Monday, November 27, 2017
Lee Family
평창 이씨
My family name is Lee. The Lee family name ranks 2nd largest population in Korea because it is made up of 275 sub-groups differentiated by geo location. In my case I am The Pyongchang Lee or the Lee of Pyongchang County. The Pyongchang Lee clan is one of the smallest clans with population of just 67,000 because The Pyongchang Lee had four generations of Catholic Martyrs. Pyongchang Lee maintains a The Pyongchang Lee Family Association office at 04569 Seoul Joongu Taegaero 79-10 Heungin Building 1002, Tel: 02-2234-8840. Pyonchang is a county in Gangwon province, South Korea. It is located in Taebaek Mounts region, about 100 miles east of Seoul. It is famous for hosting 2018 Winter Olympics.
The clan's founder was Lee Kwang (1125-1182). He was a Civil Servant Class 1 (highest out of 18 classes) during Koryo kingdom. Koryo is Korean pronunciation of Korea, and Civil Servant Class 1 means he passed the imperial exam with a highest honor. He was appointed the minister of education, and King's advisor. When Koryo kingdom was overthrown by a military coup d'etat by the founder of Chosen Dynasty, the Pyongchang Lee clan remained loyal to Koryo.
Pyongchang Lee's were Neo-Confucianism scholars. Neo-Confucianism is Confucianism 2.0. Unlike Taoists and Buddhists who focused on spiritual development, religious enlightenment, and immortality using superstition, Neo-Confucianists focused on rational ethical philosophy. The important distinction here is that Neo-Confucianists are philosophers trained to seek the Truth. The truth as in bible truth.
The family was traditionally a scholarly family. In Korean nobility system, one becomes an aristocrat by passing a tough Imperial Examination. Upon passing the exam, he is appointed to a rank based on the test score. Any aristocrat family which does not produce a civil servant in 3 generations were stripped of nobility. It was important to pass the exam, and pass it with the highest score possible. Even today high test score is prized above all else.
The notable dignitaries were Queen HyoGong, and Lee Seung-Hun. Queen HyoGong was a great-great-grandmother to the founder of Chosen Kingdom. Lee Seung-Hun is in the history books as the first Korean Christian.
LEE SEUNG-HUN, KOREAN CATHOLIC #1
Lee Seung-hun (1756-1801) was the first Korean to get baptized and one of the founders of the first Catholic Church in Korea. His baptism name of Peter. He lived the virtues of the saints, and evangelized the Catholic faith to noble and peasants.
He was born in Seoul in 1756. His father Lee Tong-uk was a Vice Minister (참판), a high ranking officer. His mother was a great grand daughter of Lee Ik, a Neo-Confucian Pragmatism scholar, and a sister of Lee Ka-hwan, a well known author. Lee Seung-hun was intelligent and was able to read the difficult Chinese literature at a very young age. He had an appointment at Sung Gyun Kwan, the highest learning institute of Korea. He became well known among the scholars a noble scholar of Nam-in Pro-King Party. In 1783, a 27 years old scholar diplomat Lee Seung-hun was on his way to China on a government envoy.
During his stay in Peking, Lee Seung-hun visited the North Catholic Church. Father Louis de Grammont, a French Jesuit missionary, decided that Lee was well qualified for baptism. He baptized Lee Seung-hun in February of 1784 and gave him the name of Peter. Peter returned to Seoul with many Catholic books, crosses, rosaries, statues, etc. for the bible study group. He also baptized his friend Lee Byok with baptism name John the Baptist. John baptized many others. As the number of believers increased, they held Sunday services at house of Kim Bom-Woo in Myong Hill (the present site of Myongdong Cathedral). Korean Catholics worshiped without an ordained priest for many years. The Korean Catholics called one another "believing friends". The government persecution began in 1785. The church as Kim Bom Woo's house was raided. The nobles, including Lee Seung-hun, were allowed to return home , but Kim Bom-woo, who was not a noble, was arrested, suffered severe tortures and died two years later in exile.
The nobles were displeased with Catholics. The Catholic faith was abolishing class distinctions, disapproving ancestor offering, and publishing writings in Korean alphabet. All considered a heresy and treason by them. They sent repeated reports to the king denouncing the Catholic as a heresy. The King, who initially did not wish to intervene, finally relented and ordered the persecution of Catholics in 1791.
Lee Seung-hun went dormant for two years, but he organized a new Catholic church again. He conducted Sunday Masses and administered sacraments. However, he was asked by Bishop of Peking (Gouvéa) to stop meeting since Korean had no ordained priests. The bishop of Peking finally assigned a Chinese priest, O (Jean dos Remedios), to go Korea. But he never made to Korea. A second priest, a Chinese priest, Chu Mun-mo Vellozo, was sent to Korea in 1794. The government tortured many Catholics in order to locate him. Chu Mun-mo initially hid, but turned himself into the authority to stop to torturing. Chu Mun-mo was martyred.
To understand why there were so many killing, one must understand that 18th century Korea was a class society based on Confucianism with its hierarchical relationships. There was a small minority of privileged scholars and nobility while the majority were commoners paying taxes, providing labor and manning the military, and a class of peasants and slaves. The Gospel "I no longer call you slaves - I call you friends" had a huge impact on peasants and slave group. Naturally the nobility perceived this new ideal as subversive of the establishment. Torture and execution followed.
In 1801, the Korean Catholic Church was subject to the first major repression by the government (the Sinyu Persecution) in which more than 300 people were killed. Lee Seung-Hun, was martyred by beheading on the 26th of the 2nd lunar month (April 8), 1801. His son and grandson were martyred in 1868, and his great-grandson were martyred in 1871.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현 만천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간략정보]
한자 李承薰
분야 종교·철학/천주교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종교인
성별 남
생년 1756년-**
몰년 1801년 4월 8일
본관 평창(平昌)
관련사건 을사추조적발사건|진산사건|을묘실포사건
저서(작품) 만천유고
[정의]
1756(영조 32)∼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개설]
세례명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지금의 中林洞 일대)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약현(若鉉)·약종(若鍾)·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이가환·정약종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伴村:지금의 惠化洞)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89년에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伴會事件)이 문제되어 투옥되었지만, 관직만을 삭탈당하고 곧 방면되었다.
1795년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했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 蔓川遺稿≫를 남겼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이승훈은 1856년(철종 7)에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사학징의(邪學懲義)』
『한국천주교회사』(류홍렬, 분도출판사, 1964)
『한국가톨릭사의 옹위(擁衛)』(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저, 최석우·안응렬 역주, 분도출판사, 1980)
이승훈 성현은 1756년 서울 반석방에서 당시 대문장가였던 평창이씨 이동욱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현께서는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1779년에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광암 이벽성조에게서 당시 천학이라 부르던 천주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이벽 성조의 명을 받은 이승훈 성현께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된 아버지 이동욱공을 따라 1783년 늦가을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이른 봄에 귀국함으로써 국내에서 선교사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갓 태어난 조선천주교회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훈 성현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벽성조께서는 몹시 기뻐서,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이벽성조께서 이승훈성현에게 한, 주목할 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사실 종교서적을 아직 많이 접하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아서 천주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던 이승훈 성현은 이벽성조의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 책을 몇 권 더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성조께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 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천주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라고 했다.
이벽 성조의 이 말씀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이벽성조의 말씀은 이승훈 성현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 성현은 이벽성조의 말씀을 대도사님(大道師)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부여된 사명을 완수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승훈 성현은 드디어 1783년 11월 18일 동지사 일행에 섞여서 아버지 이동욱 공을 따라 그 해 말 경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북당에 가서 1784년 이른 봄 귀국 전에 드 그라몽신부 에게서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즉,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성현은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성물을 몇 가지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 성조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벽성조는 이승 훈 성현이 가져온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벽성조께서는 천주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논증 방법서적과,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서적, 7성사의 해설서,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 그 날 그 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주교라는 것이 어떠한 종교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 가면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은 이렇게 생장하고 있었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도 커갔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온 이벽성조는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오.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 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이리하여 우리 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정식 세례를 받게된 이승훈 성현은 자신을 북경에 파견한 이벽성조와 그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 성현으로부터 [요한세자]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은 이벽성조는 그 때부터 전교에 나서서, 권철신 형제와 정약종, 약전, 약용 삼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감을 보고,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을 교회로 삼아, 이승훈 성현과 함께, 최초의 주일행사를 지내게 되었다. 머리에 책건을 쓰고, 집회에 모인 수십명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처음 창립한 조선 천주교회를 더욱 튼튼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어떠한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온 세계의 전교 역사상에 있어서,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서로 교우라고 불러, 엄격했던 그때의 계급제도를 타파하면서, 조상의 신주를 신처럼 모심을 걷어치우고, 언문이라고 불러 업신여기던 한글로써 한문 교리책을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선생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장으로 귀양가 2년후 즉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장독(杖毒)으로 죽으니, 2년 전 을사박해 당시에 순교한 이벽 성조의 뒤를 이어 한국천주교회가 두 번째 바치는 殉敎祭가 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첫 박해를 받게 되니, 동방의 [베드로]이던 이승훈 성현은 문중의 유림으로부터 또 가정의 형제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 을사박해로 서울의 양반들이 모두 통문을 돌리며 들고일어나자, 문중의 유림들과 원로들이 연쇄반응으로 일제히 분격하여 일어났으며, 서울 양반들의 영향은 문중으로 가정으로 점점 강도를 더해서 심한 박해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 성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모든 천주교 책들을 빼앗아 안마당에 쌓아 놓고, 문중대표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러 태우게 하니, 이른 바 분서(焚書)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이승훈 성현께서는 굴하지 않고 신유박해 때 목이 칼에 떨어질 때까지 신앙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 성현은 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닦던 반촌에 집회처를 정하고, 자신과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정약용 등을 함께 신부라 일컬으면서, 주일미사 등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임시준성직자단을 만들어 얼마동안 지내는 사이에, 그 임시준성직자단 중의 어떤 이가 이러한 직무가 교회법에 잘못되고 어긋나는 것을 알고난 후, 1789년 10월 북경에 윤유일을 보내어서,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 못하다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이승훈 성현은 임금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1789년 33세 때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그는 그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도 천주교신앙 때문에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림의 지탄을 받아, 2년 후 그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다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승훈,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로부터 임시준성직자단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윤유일을 그곳에 거듭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주 신부가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들어와보니, 조선천주교회는 이벽성조의 창립 이후, 임시준성직자단의 활동으로 이미 4000여명의 영세신자를 가진 큰 교회로 성장되어 있었다. 주신부는 강완숙이라는 여회장의 집에 숨어서 4천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사바만을 잡아죽이고 이승훈 성현을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주 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두루 다니면서 전교에 힘쓴 결과, 1801년까지에는 많은 수의 교우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그의 계조모이던 벽파의 김대비 정순왕비가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의 정권을 잡게 되니, 그녀는 그해 12월부터 교인들을 잡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에는 삼백여명의 교우들을 죽이는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승훈 성현은 체포되자마자 박해자들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며 굽히지 않으므로, 억지로라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소문을 내야만 하는 박해자들은 그의 취조문에 이승훈 성현의 대답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을 추가하여 허위조작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는 대학자 이승훈 성현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소문을 꼭 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교선언자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서 귀양을 보내었으나, 박해자들이 조작한 허위배교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허위조작의 탄로가 새로운 불씨가 되므로, 천주교를 안 하기로 하고 배교한다고 말했다고 허위조작한 후, 즉시 처형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 천주와 교회를 위해서 신앙 때문에 칼에 목이 떨어진 사실을 모든 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처형되기 직전 최후의 형벌을 참관한 박해자 대표단이 직접 보고한 바를 읽어보자.
즉 성현이 순교하시기 겨우 12일 전인, 그러니까 2월 14일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는 이승훈 등 3인의 추국 광경을 목도하고 상소하기를,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오니 승훈 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로 서려 있고, 마수(魔手)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건만 형장(刑杖)을 참으려 굴복치 않고, 사찰이 당장 잡혔건만 죽자 하고 실토치 않으니 천하에 이같이 모질고 흉측한 종류가 어디 또 있으리까?" 하였고, 또 며칠 전「헌부신계」 (憲府新啓)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어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가환, 승훈, 약용의 죄여! 칼과 톱 보기를 낙지로 삼고, 이미 대각의 성토가 극률을 청하는데 이르렀건만, 모질게도 움직이지 않고 끝끝내 고치지 않는도다! 지금 이 3인을 치죄하지 않고는 비록 날마다 백 명씩을 베어도 종당 금할 길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이 3인을 먼저 엄히 추국하여 그 정상을 얻어 쾌히 나라의 형법을 바로잡아야 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서소문에서 칼을 받기 직전 동생 李致薰 공이 따라가서, 피투성이가 된 이승훈 성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아버님과 조카들과 형수님과 저희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말씀만 하시어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보십시다" 하자, 이승훈 성현은 "무슨 소리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고, 물은 치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하시어, 당신의 신앙은 변함없이 하느님께 있고, 세도가들의 칼날은 스스로 소멸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장엄하게 순교의 칼을 받으시니, 1801년 음력 2월 26일, 양력 그해 4월 8일이었고, 당시 나이는 45세였다. 박해자들이 서둘러 이승훈 성현의 목을 칼로 자른 이유는, 북경에 가서 최초로 영세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박해자들이 몹시 미워하였고(in odium fidei), 이승훈 성현의 목을 잘라야 다른 선비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을 것이니, 교육상 필요했고, 박해자들 자신이 허위로 조작한 배교문장이나 배교소문이 탄로가 날까 우려했기 때문에 서둘러 참수하게 된 것이다.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시조는 광(匡)이다. 광의 8세손 천기(天驥)는 고려 말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했으며, 중추적 인물로는 천기의 증손인 영서(永瑞)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특히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영서의 아들 계남(季男)·계동(季仝) 형제가 뛰어나 계남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반정 공신에 올랐으며, 계동 역시 연산군 때 병조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근세 인물로는 한국 가톨릭교사(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승훈(承薰) 일가가 유명하다.
이 한국의 성씨.
이계남 조선 중기의 문신.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평원군에 봉해졌다. 국가의 재정을 잘 운영하였다는 평을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관직을 이용하여 재물을 모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계동 조선 전기의 무신. 영안북도 병마절도사로 야인을 회유, 변경을 침범치 않게 했고 야인 이마차를 토평했다. 병조판서, 비융사제조 등을 지내고 갑주를 만들었다.
이승훈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했다. 두번의 배교(背敎)와 복교(復敎)를 반복하며 결국은 순교하였다.
이학규 조선 후기의 학자.18세 때 《규장전운》,《어제홍재전서》의 수교를 맡았다. 1801년(순조1) 신유박해 때 장인 이가환이 화를 입게 되자 사학도(邪學徒)로 몰려 김해에 귀양갔다. 저서《명물고》,《영남악부》,《광시칙》등이 있다.
이동욱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난 이후로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 천주교 배격에 앞장섰다.
이재의 조선시대 천주교도이자 순교자이다.이승훈의 손자이다. 페레올 주교를 동반하여 전교(傳敎)사업을 도왔다. 1868년에 순교했다.
평창 이씨 (平昌 李氏)
관향 강원도 평창군
시조 이광 (李匡)
주요 집성촌 평안북도 초산군
평안남도 강서군
함경남도 북청군
경상북도 울진군
강원도 평창군
황해도 금천군
강원도 양구군
강원도 평강군
주요 인물 효공왕후, 이계동, 이승훈, 춘성, 이영춘,이한림, 이대용, 이영덕, 리영희, 이경자
인구(2000년) 65,945명 (115위)
정의영(丁義英)에게 출가한 정선 출신의 평창이씨는 시부모를 공경하며 집안 살림을 잘 이끌어나갔고, 남편 정씨도 착실하게 농사를 지었다. 어느 해 겨울 강 너머 사지막마을의 잔치에 다녀오던 남편이 그만 얼어 있는 강 속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씨는 남편이 죽은 얼음구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얼음을 깨고 두 사람의 시신을 꺼내보니 이씨가 남편 손을 꼭 잡은 채 죽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48206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했다. 두번의 배교(背敎)와 복교(復敎)를 반복하며 결국은 순교하였다.
만천이승훈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인천직할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로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요,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아들 신규, 택규(宅墾)의 묘가 있다. 산 밑에 넓게 펼쳐진 마을은 새들이 많이 찾아들어 조곡(鳥谷) 마을이라 불렀고, 평창(平昌) 이씨가 대대로 살아오는 곳이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재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1973년,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이곳에 있는 선영의 묘는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낙화산골로 이장되었고, 이승훈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 묘만 남게 되었다.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 묘가 개봉되어 유해가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이때 묘에서 「成均進士李公承薰墓」라고 쓴 사발이 출토되었다. 1980년 이승훈의 후손을 찾아 나선 고 오기선 신부에게 반주골 조곡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63세)씨가 이승훈 선조가 참수 전 마음에 뜻을 남긴 최종시「月落在天 水上池盡/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고, 물은 비록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하다.」는 시가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 온다고 증언해 주어, 오늘 이승훈 선각자의 묘를 순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의 묘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묵상해 보는 바른 순례가 되어야 할것이다.
■ 순교자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이승훈(子 子術, 號는 蔓川 혹은 晩泉) 베드로는 평창 이씨 가문에서 조부 광직(光玙), 부친 동욱(東都), 모친 여주(麗州) 이씨(李家煥의 누이) 사이에서 1756년(營造32년) 서울 반석방(盤石坊 : 현 中林洞 근교)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67년(12세)에 모친을 잃고, 1775년(20세)에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하여 택규, 국규(國逵), 신규 3형제를 낳았다.
1767년(25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仕)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고, 1783년(28세) 이벽(李檗)의 청으로 부친인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도착, 북당(北堂) 천주교회 그라몽(Grammont) 신부로 부터 교리교육을 받고, 1784년에 부친의 승낙 하에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 조선인으로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그해 봄, 천주교 책과 십자가 상, 선물, 상본 등을 갖고 서울에 돌아 왔다. 그는 즉시 이벽에게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내용 등을 말하고 갖고 온 책을 모두 넘겨주었다.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받은 책들을 탐독, 교리연구에 전력하였다.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최창현 등에 세례를 주기 시작하여, 단시일에 많은 신자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영세를 준 그라몽 신부에게 밀사를 통해 그간에 신생 조선교회에 있은 일을 보고했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防) 김범우(도마) 집에서 있은 종교 집회가 형조(刑曹) 금리(禁吏)에 발각되어 서학(천주교)을 금하는 효유문(曉兪文)이 반포되고, 유생(儒生)들의 척사통문(斥邪通文)이 나돌게 되자, 평창 이씨 종가 어른들에게 압력을 받은 부친 이동욱은 이승훈에게 서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심약한 그는 서학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는 벽이문·시(闢異文·詩)를 지었다.
그러나 1787년, 이승훈은 교회 지도자들이 고해성사, 미사집전 등을 행했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독성죄(瀆聖罪)가 된다는 유항검의 이의를 제기하자 즉시 중단을 시켰다. 그리고 1789년 겨울, 이승훈은 북경교구 밀사로 윤유일을 파견하여, 1790년 봄에 조상제사를 금하고 가성직제도가 부당하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받고 공동체에 알렸다. 같은 해, 이승훈은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밀파, 조선교회의 구원 방법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동시에 신자 집단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면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1791년 6월, 평택 현감이 되었으나, 11월 진산(珍山)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에 소환되어 신문 당하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황사영이 그에게 서학책을 빌려 보고 입교를 했다. 1794년(39세), 부친 이동욱이 죽고, 1795년 주문모(周文模 야교보) 신부가 입국했으나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봄, 회개하여 주신부를 만나려 했으나, 신부 입국 안내 관여자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잡혀 장살(杖殺)되어 교난이 발생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이 7월, 유생들이 서학의 괴수 이승훈을 처벌하라는 계속된 상소로 예산현(禮山縣)에 유배되어 1796년 4월에 풀려났다. 그래서 주신부와의 만남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801년(44세) 신유교난이 일어난 2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사학의 원흉으로 의금부에 구금되어 6차의 신문을 받고, 이승훈은 정약종,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시신은 자택으로 옳겨진 후 선영산이 있는 이곳 인천 만수동 반주골로 옮겨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부친 이동욱은 자식의 죄로 추삭(追削)이 내려지고, 5월에는 동생 이치훈(李致薰)은 사학의 괴수의 동생이라고 향리(鄕里)로 축출되었다. 그후 1868년,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서학 관련자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되었고, 손자 재겸(在謙)은 옥독(獄毒)으로 순교했으며, 1871년, 증손자 연구(蓮龜), 균구(筠龜), 재겸의 부인 정(鄭)씨가 제물포에서 참수 치명했다.
-pax korea 에서 발췌-
이승훈(1756∼1801·영조 32∼순조 1)의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서울 남대문밖 반석동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향리는 인천 샛골이었다. 아버지가 출사로 인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이자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
1780년(정조 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념하다가 서학을 접하게 됐고, 이벽(李蘗·1754∼1786)과 친교를 맺으면서 천주교를 알게 됐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예수회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운 뒤 L.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귀국길에 가톨릭 서적,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상본(像本) 등을 갖고 돌아왔다.
그 뒤 명례방(明禮坊:明洞)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모임을 갖던 중 1785년 관헌에 적발돼 배교했다가 1787년 교회로 돌아와 자치적으로 활동을 개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했다. 성직제도란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임시로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한 제도. 이승훈이 대주교가 되고, 권일신 ·유항검 등 10인을 사제(司祭)로 삼았다.
한편 1789년 평택현감에 등용되었는데, 1790년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의 금지를 명한 베이징 주교의 말을 전하자 다시 배교했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돼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 세번째 배교한 뒤 풀려났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밀입국하자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이듬해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한 혐의로 체포, 예산(禮山)에 유배됐가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이가환(李家煥)·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1801년 4월8일(음력 2월 26일) 그의 나이 45세 때다.
그의 유해는 여종 이갑례에 의해 향리 인천의 샛골로 옮겨져 선영(현 만수 임대아파트 7, 8단지 일대)에 장사됐다. 속칭 ‘능밑’이라 불리던 이승훈 가문의 선영은 1981년 11월28일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李炳奎·베드로)가 경기도 천진암으로 이장을 위해 개관하니 ‘成均館進士李公承薰墓’(성균관 진사 이공 승훈묘)란 사발이 나와 ‘목없는 묘’라 부르던 묘가 이승훈의 것임이 확인됐다. 그리고 이튿날(11월 29일) 천진암 성역화위원회가 유골을 천진암 성지로 이장, 한국 교회 창립 선조 묘역의 이벽 묘소 옆자리에 안장했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
2. 평택지역의 천주교 전래
1) 이승훈(베드로)과 한국 전주교회 창설
2백여 년 전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인 조선(朝鮮)에서 젊은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또한 교회를 창설했을 때, 세계가 놀라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우리 겨레에 의해 스스로 창설된 자생 교회로서의 긍지와, '숭유(崇儒)'를 '국시(國是)'로하는 기존 질서체계의 도전과 피의 탄압을 백여 년간이나 받으면서도 꺾이지 않고 뿌리를 내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교회로서의 보람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래된 기원과 그 발전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일이다.
17세기 초엽 중국에서 반입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남인계(南人系) 학자들에 의해 실학운동(實學運動)의 일환으로 연구되기 시작함으로써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이 서학 연구는 1779년 천진암 강학회(天眞菴 講學會)와 같은 집회를 통하여 한 차원 높은 신앙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천진암 강학회의 한 멤버였던 이승훈(李承薰)이 1784년 봄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주로 양반 지식인들에게 전교하면서 천주교는 서울에서 경기, 충청, 전라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진위자방과 충청도에 속했던 평택지방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경로로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 또한 이 지방 사람으로 처음 영세한 이는 과연 누구인지를 고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타지방의 천주교인으로서 진위, 평택땅을 처음 밟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문헌에 나타나는 대로라면 앞에 말한 이승훈이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서 평택지방에 첫발을 디딘 천주교 신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현감 처소인 객사리(客舍里)에서 30여리 떨어진 대추리(大秋里)까지 찾아가 전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승훈은 비록 전교를 목적으로 평택에 온 것은 아닐지라도 평택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첫 사도였음이 분명하다.
이승훈은 평창(平昌)에 본관을 둔 이동욱(李東郁)의 장남으로 1756년(丙子, 英祖32년) 서울 반석방에서 출생했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였고 20세에 벌써 저명한 학자들 속에 끼었다.
1780년(庚子, 正祖4년) 25세 때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대과(大科) 시험 공부를 시작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석학(碩學)들과 교유하면서 일생을 학문과 수양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호(號)를 만천(蔓川, 또는 晩泉)이라 일컬은 그는 20세에 경기도 마재에 사는 유명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어 후일 세 아들(택규, 국규, 신규)과 딸 하나를 두었다.
1779년(己亥, 正祖3년) 겨울에 이승훈은 경기도 광주 땅 앵자산의 천진암에서 당대의 대학자 권철신(權哲身)의 주도로 개최된 강학회에 그와 처남 매부 지간인 정약전(丁若전), 약종(若鐘), 약용(若鏞) 형제 및 권철신, 일신(日身) 형제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천학(天學)을 연구하였다.
1783년(癸卯, 正祖7년) 10월에 이승훈은 동지사(冬至使) 황인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의 수행원 자격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라 12월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784년, 甲辰 正祖8년) 봄에 그곳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랑몽(Grammont, 梁棟材)신부로부터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고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당시 이승훈에게 영세를 권고한 사람은 권철신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하고 있던 이벽(李檗)이었다. 이승훈이 사신행차를 따라 북경으로 떠날 때에 이벽이 비밀리에 이승훈을 만나, 북경에는 천주당(天主堂)이란 곳이 있고 천주당에는 서양 선비로서 전교하는 이가 있다고 하니, 그를 찾아보고 영세를 청하는 한편 신경(信經) 한부와 서양의 물건들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수십 종의 천주교 관련 서적과 묵주, 상본 등을 얻어 가지고 1784년 3월말에 아버지 일행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사도 성 베드로와 같은 '사람 낚는 어부'의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여, 수표교(水標橋)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자 요한'으로 세례를 주는 한편 이벽, 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실의(天主實義) 같은 책을 탐독하여 천주교를 연구한 후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전교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 영세자들과 함께 열심 수계하고 주일과 첨례를 지키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니 이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태어난 지 1년만에 첫 시련에 봉착했다. 1785년(乙巳, 正祖9年) 봄 이승훈, 권일신, 상문(相問) 부자, 이벽, 정약전과 그의 두 동생, 최인길(崔仁吉), 김범우(金範禹) 등 수십 명이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에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던 중 형조(刑曹)의 금리(禁吏)가 그 앞을 지나가다 노름방으로 의심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집회 참석자들을 거동이 수상한 자로 체포하여 거기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과 화상(畵像)과 그 밖의 물건들과 함께 형조로 압송하였다.
그들을 심문한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이승훈 등은 신분이 사대부(士大夫)라 하여 훈방하고 집회장소 제공자이며 역관(譯官) 집안 출신인 중인(中人) 신분의 김범우 한 사람만 옥에 가두고 배교를 강요하였다. 혹형을 가해도 김범우가 배교를 거부하자 경상도 밀양(密陽) 단장(丹場)으로 귀양을 보냈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을 하다 1786년 형조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추적발(乙巳秋摘發)' 인데 이 사건의 풍파가 가라앉자 1786년(丙午, 正祖10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고해성사를 보는 일을 의논한 끝에 신자들이 서로 성사를 보도록 결정하고, 갑(甲) 은 을(乙) 과 병(丙)에게 고해를 하되 갑과 을 또는 을과 병은 서로 고해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 신앙공동체는 이승훈에게 미사성제와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주교, 신부의 권한을 위임하였고, 이승훈은 다른 지도자 10명(이벽, 권일신, 최창현, 홍낙민, 이존창, 유항검 등)을 신부로 임명함으로써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가 설정되었다.
교회도 하나의 단체인 만큼 일정한 조직체계가 필요함은 당연하였고, 이에 따라 이승훈이 북경 교회에서 본 대로 교계(敎階), 즉 성직단(聖職團)을 조직하게 된 것인데 이는 물론 교회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가성직제도는 1787년까지 2년간 계속되다가 신부의 한 사람인 유항검(柳抗儉)이 《청 캬오 유아 야오》(Cheng Kiao Iva yao)란 책을 읽고 가신부(假神父, 평신도)들의 성사 집전이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중단하였다.
그리고 나서 1789년(乙酉, 正祖13년) 10월 한국 교회는 이승훈의 제안으로 여러 가지 궁금증에 대해 문의하고 또한 교회설정을 보고할 겸 예비신자 윤유일(尹有一)을 북경 교회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때 윤유일은 가성직제도의 잘못에 대해 고백하는 이승훈의 편지를 휴대했다. 그 무렵 한국교회는 5년간 놀랍게 발전하여 전국의 신자수가 천명에 달하고 있었다.
윤유일은 천신만고 끝에 1789년 12월 북경에 도착하여 이승훈의 편지를 그 곳 선교사에게 전하는 한편 이듬해 2월 9일 판지(Panzi) 수사를 대부로 하여 북당 선교단장이며 라자리스트 회원인 로오(Raux) 신부로부터 조건부 세례를 받고(세례명 바오로), 조상제사를 금할 것과 가성직제도의 잘못에 대해 상등통회(上等痛悔) 할 것과 성사 받을 방법을 강구하라는 로오 신부와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받아 가지고 무사히 돌아왔다.
윤유일이 미처 여독을 풀 사이도 없이 1790년 7월 이승훈 등 교회 지도자들은 마침 그 때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의 80회 탄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행차 편에 윤유일과 우(禹)요한을 재차 북경에 파견하여 신부를 파견해 주도록 다시 요청하였다.
북경으로의 2차 밀사 파견에 앞서 1787년(丁未, 正祖11년) 10월 이승훈과 정약용, 진사 강이원(姜履元) 등이 반촌(泮村) 김석태(金石太) 집에서 과거공부를 핑계로 젊은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같은 성균관 유생 이기경(李基慶)이 발견하고 성균관에서 성토하고 나섰다. 이른바 '정미 반촌회(丁未 泮村會)'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이승훈은 또 한 차례의 곤욕을 치렀다.
1) 평택현감 이승훈(베드로)의 성묘불배 사건
2차 북경 길에 나선 윤유일(바오로)이 출발한 직후인 1790년 10월 이승훈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2월에는 서부도사(西部都事)로 4개월간 재임한 후 1791년(辛亥, 正祖15년) 6월 24일 평택현감(平澤縣監)이 되어 충청도로 내려갔다.
이승훈의 평택현감 재직기간은 매우 짧았다.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등 교우들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려 큰 파문을 일으킨 데다 정원(政院)에서 1785년의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 재론되고 또 의금부(義禁府)에서 홍낙안(洪樂安)의 문계(問啓)를 인용하여 이승훈을 구서사(購書事), 간책사(刊冊事) 등에 관련된 죄목으로 거론함으로써 1791년 11월 8일 재임 4개월 여만에 평택 현감직을 삭탈 당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792년(壬子, 正祖16년)에는 이승훈이 평택현감으로 재직할 때 평택 향교(鄕校)의 문묘(文廟)라고도 하는데, 공자(孔子)를 받드는 사당을 말한다.
이른바 평택현감 이승훈의 '성묘불배(聖廟不拜)'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내용인즉 한 고을에 수령이 부임하면 3일 내에 성묘에 분향 배례하는 것이 관례요 불문율인데, 이승훈은 보름이 지나도록 그것을 하지 않았고, 향교에 비가 새자 비로소 봉심(奉審)은 하였으나 봉심 때는 배례를 하지 않는다는 고규(故規)를 들어 이 때도 배례를 하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분묘는 객사리(현 팽성읍 객사리)에 있었다.
이승훈이 문묘에 배례를 하지 않자 평택 유생 조상본(趙常本), 권위(權瑋), 정언택(鄭彦宅) 등 삼정사(三正士)가 성균관에 연명으로 통문을 보내 이승훈의 죄상을 성토하고 나섰다.
고을 수령이 관례를 어기고 공자의 사당에 배례하지 않는 행위는 그 시대에 있어서는 죽음을 면치 못할 대죄에 해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고 상소까지 하자 조정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1792년 2월 안핵어사(按핵御使)를 평택에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안핵어사로 파견된 김희채(金熙采)는 이승훈의 친척(재종매부)으로서 이승훈을 두둔하기 위해 이승훈이 성묘에 배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례를 한 것처럼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는 한편 이승훈이 배례를 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한 평택 유생들을 오히려 관장 무고죄로 몰아 엄형에 처하였다.
2) 이승훈(베드로)의 순교
북경 주교 구베아는 한국 교회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1794(甲寅, 正祖 18)년 12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주 신부는 이듬해 1월 서울에 들어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은신하여 4천 여명의 우리 교우들을 사목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주 신부의 입국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그 씨는 그가 이미 오래 전에 뿌려놓은 것이었다.
1795(乙卯, 正祖 19)년 6월 주문모 신부의 이른바 실포(失捕) 사건 때 주 신부의 국내 영입에 관여한 윤유일, 최인길, 지황(池璜) 등이 잡혀 순교하였다. 이 사건으로 한동안 잠잠했던 척사(斥邪) 운동이 재연되었고, 그 여파로 이승훈은 충청도 예산(禮山)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풀려났다.
1800년 6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펴오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김대비(金大妃) 정순왕후(貞順王后)가 11세의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고 그해 12월부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주문모 신부 등이 순교한 신유(辛酉)박해이다.
김 대비로 말하면 본래 노론벽파(老論僻派)로서 남인시파(南人時派) 사람들이 정적(政敵)이었으므로 집권하자마자 남인시파를 일망타진하는 한편 남인시파에 속하는 천주교인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게 된 것이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이란 천주교인 색출 방법도 이때 생겼다.
그리하여 1801(辛酉, 純祖 1)년 2월 10일 이승훈도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6차에 걸친 심문을 받고 그 달 26일(음력) 그의 집(반석방)에서 가까운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이승훈의 시신은 그의 여종 이갑례에 의하여 경기도 부천군 남동 만수리(富川郡 南洞 萬壽里)20) 반주골로 옮겨져 매장되어 있다가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李炳奎 베드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장위원회 주관으로 181년만에 파헤쳐졌는데, 이때 무덤에서 ‘成均館進士李公承薰墓’(성균관 진사 이공 승훈묘)란 사발이 나와 그 동네 사람들이 ‘목없는 묘’라 부르던 묘가 이승훈의 묘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튿날(11월 29일) 천진암 성역화위원회가 유골을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여 한국 교회 창립 선조 묘역의 이벽 묘소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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