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7, 2017
Lee Family
평창 이씨
My family name is Lee. The Lee family name ranks 2nd largest population in Korea because it is made up of 275 sub-groups differentiated by geo location. In my case I am The Pyongchang Lee or the Lee of Pyongchang County. The Pyongchang Lee clan is one of the smallest clans with population of just 67,000 because The Pyongchang Lee had four generations of Catholic Martyrs. Pyongchang Lee maintains a The Pyongchang Lee Family Association office at 04569 Seoul Joongu Taegaero 79-10 Heungin Building 1002, Tel: 02-2234-8840. Pyonchang is a county in Gangwon province, South Korea. It is located in Taebaek Mounts region, about 100 miles east of Seoul. It is famous for hosting 2018 Winter Olympics.
The clan's founder was Lee Kwang (1125-1182). He was a Civil Servant Class 1 (highest out of 18 classes) during Koryo kingdom. Koryo is Korean pronunciation of Korea, and Civil Servant Class 1 means he passed the imperial exam with a highest honor. He was appointed the minister of education, and King's advisor. When Koryo kingdom was overthrown by a military coup d'etat by the founder of Chosen Dynasty, the Pyongchang Lee clan remained loyal to Koryo.
Pyongchang Lee's were Neo-Confucianism scholars. Neo-Confucianism is Confucianism 2.0. Unlike Taoists and Buddhists who focused on spiritual development, religious enlightenment, and immortality using superstition, Neo-Confucianists focused on rational ethical philosophy. The important distinction here is that Neo-Confucianists are philosophers trained to seek the Truth. The truth as in bible truth.
The family was traditionally a scholarly family. In Korean nobility system, one becomes an aristocrat by passing a tough Imperial Examination. Upon passing the exam, he is appointed to a rank based on the test score. Any aristocrat family which does not produce a civil servant in 3 generations were stripped of nobility. It was important to pass the exam, and pass it with the highest score possible. Even today high test score is prized above all else.
The notable dignitaries were Queen HyoGong, and Lee Seung-Hun. Queen HyoGong was a great-great-grandmother to the founder of Chosen Kingdom. Lee Seung-Hun is in the history books as the first Korean Christian.
LEE SEUNG-HUN, KOREAN CATHOLIC #1
Lee Seung-hun (1756-1801) was the first Korean to get baptized and one of the founders of the first Catholic Church in Korea. His baptism name of Peter. He lived the virtues of the saints, and evangelized the Catholic faith to noble and peasants.
He was born in Seoul in 1756. His father Lee Tong-uk was a Vice Minister (참판), a high ranking officer. His mother was a great grand daughter of Lee Ik, a Neo-Confucian Pragmatism scholar, and a sister of Lee Ka-hwan, a well known author. Lee Seung-hun was intelligent and was able to read the difficult Chinese literature at a very young age. He had an appointment at Sung Gyun Kwan, the highest learning institute of Korea. He became well known among the scholars a noble scholar of Nam-in Pro-King Party. In 1783, a 27 years old scholar diplomat Lee Seung-hun was on his way to China on a government envoy.
During his stay in Peking, Lee Seung-hun visited the North Catholic Church. Father Louis de Grammont, a French Jesuit missionary, decided that Lee was well qualified for baptism. He baptized Lee Seung-hun in February of 1784 and gave him the name of Peter. Peter returned to Seoul with many Catholic books, crosses, rosaries, statues, etc. for the bible study group. He also baptized his friend Lee Byok with baptism name John the Baptist. John baptized many others. As the number of believers increased, they held Sunday services at house of Kim Bom-Woo in Myong Hill (the present site of Myongdong Cathedral). Korean Catholics worshiped without an ordained priest for many years. The Korean Catholics called one another "believing friends". The government persecution began in 1785. The church as Kim Bom Woo's house was raided. The nobles, including Lee Seung-hun, were allowed to return home , but Kim Bom-woo, who was not a noble, was arrested, suffered severe tortures and died two years later in exile.
The nobles were displeased with Catholics. The Catholic faith was abolishing class distinctions, disapproving ancestor offering, and publishing writings in Korean alphabet. All considered a heresy and treason by them. They sent repeated reports to the king denouncing the Catholic as a heresy. The King, who initially did not wish to intervene, finally relented and ordered the persecution of Catholics in 1791.
Lee Seung-hun went dormant for two years, but he organized a new Catholic church again. He conducted Sunday Masses and administered sacraments. However, he was asked by Bishop of Peking (Gouvéa) to stop meeting since Korean had no ordained priests. The bishop of Peking finally assigned a Chinese priest, O (Jean dos Remedios), to go Korea. But he never made to Korea. A second priest, a Chinese priest, Chu Mun-mo Vellozo, was sent to Korea in 1794. The government tortured many Catholics in order to locate him. Chu Mun-mo initially hid, but turned himself into the authority to stop to torturing. Chu Mun-mo was martyred.
To understand why there were so many killing, one must understand that 18th century Korea was a class society based on Confucianism with its hierarchical relationships. There was a small minority of privileged scholars and nobility while the majority were commoners paying taxes, providing labor and manning the military, and a class of peasants and slaves. The Gospel "I no longer call you slaves - I call you friends" had a huge impact on peasants and slave group. Naturally the nobility perceived this new ideal as subversive of the establishment. Torture and execution followed.
In 1801, the Korean Catholic Church was subject to the first major repression by the government (the Sinyu Persecution) in which more than 300 people were killed. Lee Seung-Hun, was martyred by beheading on the 26th of the 2nd lunar month (April 8), 1801. His son and grandson were martyred in 1868, and his great-grandson were martyred in 1871.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현 만천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간략정보]
한자 李承薰
분야 종교·철학/천주교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종교인
성별 남
생년 1756년-**
몰년 1801년 4월 8일
본관 평창(平昌)
관련사건 을사추조적발사건|진산사건|을묘실포사건
저서(작품) 만천유고
[정의]
1756(영조 32)∼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개설]
세례명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지금의 中林洞 일대)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약현(若鉉)·약종(若鍾)·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이가환·정약종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伴村:지금의 惠化洞)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89년에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伴會事件)이 문제되어 투옥되었지만, 관직만을 삭탈당하고 곧 방면되었다.
1795년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했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 蔓川遺稿≫를 남겼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이승훈은 1856년(철종 7)에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사학징의(邪學懲義)』
『한국천주교회사』(류홍렬, 분도출판사, 1964)
『한국가톨릭사의 옹위(擁衛)』(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저, 최석우·안응렬 역주, 분도출판사, 1980)
이승훈 성현은 1756년 서울 반석방에서 당시 대문장가였던 평창이씨 이동욱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현께서는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1779년에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광암 이벽성조에게서 당시 천학이라 부르던 천주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이벽 성조의 명을 받은 이승훈 성현께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된 아버지 이동욱공을 따라 1783년 늦가을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이른 봄에 귀국함으로써 국내에서 선교사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갓 태어난 조선천주교회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훈 성현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벽성조께서는 몹시 기뻐서,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이벽성조께서 이승훈성현에게 한, 주목할 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사실 종교서적을 아직 많이 접하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아서 천주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던 이승훈 성현은 이벽성조의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 책을 몇 권 더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성조께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 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천주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라고 했다.
이벽 성조의 이 말씀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이벽성조의 말씀은 이승훈 성현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 성현은 이벽성조의 말씀을 대도사님(大道師)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부여된 사명을 완수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승훈 성현은 드디어 1783년 11월 18일 동지사 일행에 섞여서 아버지 이동욱 공을 따라 그 해 말 경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북당에 가서 1784년 이른 봄 귀국 전에 드 그라몽신부 에게서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즉,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성현은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성물을 몇 가지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 성조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벽성조는 이승 훈 성현이 가져온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벽성조께서는 천주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논증 방법서적과,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서적, 7성사의 해설서,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 그 날 그 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주교라는 것이 어떠한 종교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 가면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은 이렇게 생장하고 있었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도 커갔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온 이벽성조는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오.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 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이리하여 우리 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정식 세례를 받게된 이승훈 성현은 자신을 북경에 파견한 이벽성조와 그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 성현으로부터 [요한세자]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은 이벽성조는 그 때부터 전교에 나서서, 권철신 형제와 정약종, 약전, 약용 삼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감을 보고,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을 교회로 삼아, 이승훈 성현과 함께, 최초의 주일행사를 지내게 되었다. 머리에 책건을 쓰고, 집회에 모인 수십명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처음 창립한 조선 천주교회를 더욱 튼튼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어떠한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온 세계의 전교 역사상에 있어서,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서로 교우라고 불러, 엄격했던 그때의 계급제도를 타파하면서, 조상의 신주를 신처럼 모심을 걷어치우고, 언문이라고 불러 업신여기던 한글로써 한문 교리책을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선생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장으로 귀양가 2년후 즉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장독(杖毒)으로 죽으니, 2년 전 을사박해 당시에 순교한 이벽 성조의 뒤를 이어 한국천주교회가 두 번째 바치는 殉敎祭가 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첫 박해를 받게 되니, 동방의 [베드로]이던 이승훈 성현은 문중의 유림으로부터 또 가정의 형제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 을사박해로 서울의 양반들이 모두 통문을 돌리며 들고일어나자, 문중의 유림들과 원로들이 연쇄반응으로 일제히 분격하여 일어났으며, 서울 양반들의 영향은 문중으로 가정으로 점점 강도를 더해서 심한 박해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 성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모든 천주교 책들을 빼앗아 안마당에 쌓아 놓고, 문중대표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러 태우게 하니, 이른 바 분서(焚書)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이승훈 성현께서는 굴하지 않고 신유박해 때 목이 칼에 떨어질 때까지 신앙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 성현은 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닦던 반촌에 집회처를 정하고, 자신과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정약용 등을 함께 신부라 일컬으면서, 주일미사 등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임시준성직자단을 만들어 얼마동안 지내는 사이에, 그 임시준성직자단 중의 어떤 이가 이러한 직무가 교회법에 잘못되고 어긋나는 것을 알고난 후, 1789년 10월 북경에 윤유일을 보내어서,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 못하다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이승훈 성현은 임금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1789년 33세 때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그는 그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도 천주교신앙 때문에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림의 지탄을 받아, 2년 후 그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다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승훈,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로부터 임시준성직자단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윤유일을 그곳에 거듭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주 신부가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들어와보니, 조선천주교회는 이벽성조의 창립 이후, 임시준성직자단의 활동으로 이미 4000여명의 영세신자를 가진 큰 교회로 성장되어 있었다. 주신부는 강완숙이라는 여회장의 집에 숨어서 4천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사바만을 잡아죽이고 이승훈 성현을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주 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두루 다니면서 전교에 힘쓴 결과, 1801년까지에는 많은 수의 교우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그의 계조모이던 벽파의 김대비 정순왕비가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의 정권을 잡게 되니, 그녀는 그해 12월부터 교인들을 잡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에는 삼백여명의 교우들을 죽이는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승훈 성현은 체포되자마자 박해자들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며 굽히지 않으므로, 억지로라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소문을 내야만 하는 박해자들은 그의 취조문에 이승훈 성현의 대답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을 추가하여 허위조작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는 대학자 이승훈 성현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소문을 꼭 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교선언자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서 귀양을 보내었으나, 박해자들이 조작한 허위배교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허위조작의 탄로가 새로운 불씨가 되므로, 천주교를 안 하기로 하고 배교한다고 말했다고 허위조작한 후, 즉시 처형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 천주와 교회를 위해서 신앙 때문에 칼에 목이 떨어진 사실을 모든 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처형되기 직전 최후의 형벌을 참관한 박해자 대표단이 직접 보고한 바를 읽어보자.
즉 성현이 순교하시기 겨우 12일 전인, 그러니까 2월 14일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는 이승훈 등 3인의 추국 광경을 목도하고 상소하기를,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오니 승훈 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로 서려 있고, 마수(魔手)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건만 형장(刑杖)을 참으려 굴복치 않고, 사찰이 당장 잡혔건만 죽자 하고 실토치 않으니 천하에 이같이 모질고 흉측한 종류가 어디 또 있으리까?" 하였고, 또 며칠 전「헌부신계」 (憲府新啓)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어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가환, 승훈, 약용의 죄여! 칼과 톱 보기를 낙지로 삼고, 이미 대각의 성토가 극률을 청하는데 이르렀건만, 모질게도 움직이지 않고 끝끝내 고치지 않는도다! 지금 이 3인을 치죄하지 않고는 비록 날마다 백 명씩을 베어도 종당 금할 길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이 3인을 먼저 엄히 추국하여 그 정상을 얻어 쾌히 나라의 형법을 바로잡아야 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서소문에서 칼을 받기 직전 동생 李致薰 공이 따라가서, 피투성이가 된 이승훈 성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아버님과 조카들과 형수님과 저희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말씀만 하시어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보십시다" 하자, 이승훈 성현은 "무슨 소리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고, 물은 치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하시어, 당신의 신앙은 변함없이 하느님께 있고, 세도가들의 칼날은 스스로 소멸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장엄하게 순교의 칼을 받으시니, 1801년 음력 2월 26일, 양력 그해 4월 8일이었고, 당시 나이는 45세였다. 박해자들이 서둘러 이승훈 성현의 목을 칼로 자른 이유는, 북경에 가서 최초로 영세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박해자들이 몹시 미워하였고(in odium fidei), 이승훈 성현의 목을 잘라야 다른 선비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을 것이니, 교육상 필요했고, 박해자들 자신이 허위로 조작한 배교문장이나 배교소문이 탄로가 날까 우려했기 때문에 서둘러 참수하게 된 것이다.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시조는 광(匡)이다. 광의 8세손 천기(天驥)는 고려 말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했으며, 중추적 인물로는 천기의 증손인 영서(永瑞)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특히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영서의 아들 계남(季男)·계동(季仝) 형제가 뛰어나 계남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반정 공신에 올랐으며, 계동 역시 연산군 때 병조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근세 인물로는 한국 가톨릭교사(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승훈(承薰) 일가가 유명하다.
이 한국의 성씨.
이계남 조선 중기의 문신.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평원군에 봉해졌다. 국가의 재정을 잘 운영하였다는 평을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관직을 이용하여 재물을 모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계동 조선 전기의 무신. 영안북도 병마절도사로 야인을 회유, 변경을 침범치 않게 했고 야인 이마차를 토평했다. 병조판서, 비융사제조 등을 지내고 갑주를 만들었다.
이승훈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했다. 두번의 배교(背敎)와 복교(復敎)를 반복하며 결국은 순교하였다.
이학규 조선 후기의 학자.18세 때 《규장전운》,《어제홍재전서》의 수교를 맡았다. 1801년(순조1) 신유박해 때 장인 이가환이 화를 입게 되자 사학도(邪學徒)로 몰려 김해에 귀양갔다. 저서《명물고》,《영남악부》,《광시칙》등이 있다.
이동욱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난 이후로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 천주교 배격에 앞장섰다.
이재의 조선시대 천주교도이자 순교자이다.이승훈의 손자이다. 페레올 주교를 동반하여 전교(傳敎)사업을 도왔다. 1868년에 순교했다.
평창 이씨 (平昌 李氏)
관향 강원도 평창군
시조 이광 (李匡)
주요 집성촌 평안북도 초산군
평안남도 강서군
함경남도 북청군
경상북도 울진군
강원도 평창군
황해도 금천군
강원도 양구군
강원도 평강군
주요 인물 효공왕후, 이계동, 이승훈, 춘성, 이영춘,이한림, 이대용, 이영덕, 리영희, 이경자
인구(2000년) 65,945명 (115위)
정의영(丁義英)에게 출가한 정선 출신의 평창이씨는 시부모를 공경하며 집안 살림을 잘 이끌어나갔고, 남편 정씨도 착실하게 농사를 지었다. 어느 해 겨울 강 너머 사지막마을의 잔치에 다녀오던 남편이 그만 얼어 있는 강 속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씨는 남편이 죽은 얼음구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얼음을 깨고 두 사람의 시신을 꺼내보니 이씨가 남편 손을 꼭 잡은 채 죽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48206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했다. 두번의 배교(背敎)와 복교(復敎)를 반복하며 결국은 순교하였다.
만천이승훈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인천직할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로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요,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아들 신규, 택규(宅墾)의 묘가 있다. 산 밑에 넓게 펼쳐진 마을은 새들이 많이 찾아들어 조곡(鳥谷) 마을이라 불렀고, 평창(平昌) 이씨가 대대로 살아오는 곳이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재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1973년,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이곳에 있는 선영의 묘는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낙화산골로 이장되었고, 이승훈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 묘만 남게 되었다.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 묘가 개봉되어 유해가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이때 묘에서 「成均進士李公承薰墓」라고 쓴 사발이 출토되었다. 1980년 이승훈의 후손을 찾아 나선 고 오기선 신부에게 반주골 조곡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63세)씨가 이승훈 선조가 참수 전 마음에 뜻을 남긴 최종시「月落在天 水上池盡/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고, 물은 비록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하다.」는 시가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 온다고 증언해 주어, 오늘 이승훈 선각자의 묘를 순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의 묘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묵상해 보는 바른 순례가 되어야 할것이다.
■ 순교자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이승훈(子 子術, 號는 蔓川 혹은 晩泉) 베드로는 평창 이씨 가문에서 조부 광직(光玙), 부친 동욱(東都), 모친 여주(麗州) 이씨(李家煥의 누이) 사이에서 1756년(營造32년) 서울 반석방(盤石坊 : 현 中林洞 근교)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67년(12세)에 모친을 잃고, 1775년(20세)에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하여 택규, 국규(國逵), 신규 3형제를 낳았다.
1767년(25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仕)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고, 1783년(28세) 이벽(李檗)의 청으로 부친인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도착, 북당(北堂) 천주교회 그라몽(Grammont) 신부로 부터 교리교육을 받고, 1784년에 부친의 승낙 하에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 조선인으로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그해 봄, 천주교 책과 십자가 상, 선물, 상본 등을 갖고 서울에 돌아 왔다. 그는 즉시 이벽에게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내용 등을 말하고 갖고 온 책을 모두 넘겨주었다.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받은 책들을 탐독, 교리연구에 전력하였다.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최창현 등에 세례를 주기 시작하여, 단시일에 많은 신자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영세를 준 그라몽 신부에게 밀사를 통해 그간에 신생 조선교회에 있은 일을 보고했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防) 김범우(도마) 집에서 있은 종교 집회가 형조(刑曹) 금리(禁吏)에 발각되어 서학(천주교)을 금하는 효유문(曉兪文)이 반포되고, 유생(儒生)들의 척사통문(斥邪通文)이 나돌게 되자, 평창 이씨 종가 어른들에게 압력을 받은 부친 이동욱은 이승훈에게 서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심약한 그는 서학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는 벽이문·시(闢異文·詩)를 지었다.
그러나 1787년, 이승훈은 교회 지도자들이 고해성사, 미사집전 등을 행했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독성죄(瀆聖罪)가 된다는 유항검의 이의를 제기하자 즉시 중단을 시켰다. 그리고 1789년 겨울, 이승훈은 북경교구 밀사로 윤유일을 파견하여, 1790년 봄에 조상제사를 금하고 가성직제도가 부당하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받고 공동체에 알렸다. 같은 해, 이승훈은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밀파, 조선교회의 구원 방법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동시에 신자 집단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면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1791년 6월, 평택 현감이 되었으나, 11월 진산(珍山)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에 소환되어 신문 당하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황사영이 그에게 서학책을 빌려 보고 입교를 했다. 1794년(39세), 부친 이동욱이 죽고, 1795년 주문모(周文模 야교보) 신부가 입국했으나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봄, 회개하여 주신부를 만나려 했으나, 신부 입국 안내 관여자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잡혀 장살(杖殺)되어 교난이 발생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이 7월, 유생들이 서학의 괴수 이승훈을 처벌하라는 계속된 상소로 예산현(禮山縣)에 유배되어 1796년 4월에 풀려났다. 그래서 주신부와의 만남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801년(44세) 신유교난이 일어난 2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사학의 원흉으로 의금부에 구금되어 6차의 신문을 받고, 이승훈은 정약종,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시신은 자택으로 옳겨진 후 선영산이 있는 이곳 인천 만수동 반주골로 옮겨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부친 이동욱은 자식의 죄로 추삭(追削)이 내려지고, 5월에는 동생 이치훈(李致薰)은 사학의 괴수의 동생이라고 향리(鄕里)로 축출되었다. 그후 1868년,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서학 관련자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되었고, 손자 재겸(在謙)은 옥독(獄毒)으로 순교했으며, 1871년, 증손자 연구(蓮龜), 균구(筠龜), 재겸의 부인 정(鄭)씨가 제물포에서 참수 치명했다.
-pax korea 에서 발췌-
이승훈(1756∼1801·영조 32∼순조 1)의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서울 남대문밖 반석동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향리는 인천 샛골이었다. 아버지가 출사로 인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이자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
1780년(정조 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념하다가 서학을 접하게 됐고, 이벽(李蘗·1754∼1786)과 친교를 맺으면서 천주교를 알게 됐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예수회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운 뒤 L.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귀국길에 가톨릭 서적,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상본(像本) 등을 갖고 돌아왔다.
그 뒤 명례방(明禮坊:明洞)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모임을 갖던 중 1785년 관헌에 적발돼 배교했다가 1787년 교회로 돌아와 자치적으로 활동을 개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했다. 성직제도란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임시로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한 제도. 이승훈이 대주교가 되고, 권일신 ·유항검 등 10인을 사제(司祭)로 삼았다.
한편 1789년 평택현감에 등용되었는데, 1790년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의 금지를 명한 베이징 주교의 말을 전하자 다시 배교했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돼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 세번째 배교한 뒤 풀려났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밀입국하자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이듬해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한 혐의로 체포, 예산(禮山)에 유배됐가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이가환(李家煥)·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1801년 4월8일(음력 2월 26일) 그의 나이 45세 때다.
그의 유해는 여종 이갑례에 의해 향리 인천의 샛골로 옮겨져 선영(현 만수 임대아파트 7, 8단지 일대)에 장사됐다. 속칭 ‘능밑’이라 불리던 이승훈 가문의 선영은 1981년 11월28일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李炳奎·베드로)가 경기도 천진암으로 이장을 위해 개관하니 ‘成均館進士李公承薰墓’(성균관 진사 이공 승훈묘)란 사발이 나와 ‘목없는 묘’라 부르던 묘가 이승훈의 것임이 확인됐다. 그리고 이튿날(11월 29일) 천진암 성역화위원회가 유골을 천진암 성지로 이장, 한국 교회 창립 선조 묘역의 이벽 묘소 옆자리에 안장했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
2. 평택지역의 천주교 전래
1) 이승훈(베드로)과 한국 전주교회 창설
2백여 년 전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인 조선(朝鮮)에서 젊은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또한 교회를 창설했을 때, 세계가 놀라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우리 겨레에 의해 스스로 창설된 자생 교회로서의 긍지와, '숭유(崇儒)'를 '국시(國是)'로하는 기존 질서체계의 도전과 피의 탄압을 백여 년간이나 받으면서도 꺾이지 않고 뿌리를 내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교회로서의 보람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래된 기원과 그 발전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일이다.
17세기 초엽 중국에서 반입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남인계(南人系) 학자들에 의해 실학운동(實學運動)의 일환으로 연구되기 시작함으로써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이 서학 연구는 1779년 천진암 강학회(天眞菴 講學會)와 같은 집회를 통하여 한 차원 높은 신앙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천진암 강학회의 한 멤버였던 이승훈(李承薰)이 1784년 봄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주로 양반 지식인들에게 전교하면서 천주교는 서울에서 경기, 충청, 전라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진위자방과 충청도에 속했던 평택지방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경로로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 또한 이 지방 사람으로 처음 영세한 이는 과연 누구인지를 고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타지방의 천주교인으로서 진위, 평택땅을 처음 밟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문헌에 나타나는 대로라면 앞에 말한 이승훈이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서 평택지방에 첫발을 디딘 천주교 신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현감 처소인 객사리(客舍里)에서 30여리 떨어진 대추리(大秋里)까지 찾아가 전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승훈은 비록 전교를 목적으로 평택에 온 것은 아닐지라도 평택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첫 사도였음이 분명하다.
이승훈은 평창(平昌)에 본관을 둔 이동욱(李東郁)의 장남으로 1756년(丙子, 英祖32년) 서울 반석방에서 출생했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였고 20세에 벌써 저명한 학자들 속에 끼었다.
1780년(庚子, 正祖4년) 25세 때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대과(大科) 시험 공부를 시작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석학(碩學)들과 교유하면서 일생을 학문과 수양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호(號)를 만천(蔓川, 또는 晩泉)이라 일컬은 그는 20세에 경기도 마재에 사는 유명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어 후일 세 아들(택규, 국규, 신규)과 딸 하나를 두었다.
1779년(己亥, 正祖3년) 겨울에 이승훈은 경기도 광주 땅 앵자산의 천진암에서 당대의 대학자 권철신(權哲身)의 주도로 개최된 강학회에 그와 처남 매부 지간인 정약전(丁若전), 약종(若鐘), 약용(若鏞) 형제 및 권철신, 일신(日身) 형제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천학(天學)을 연구하였다.
1783년(癸卯, 正祖7년) 10월에 이승훈은 동지사(冬至使) 황인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의 수행원 자격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라 12월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784년, 甲辰 正祖8년) 봄에 그곳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랑몽(Grammont, 梁棟材)신부로부터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고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당시 이승훈에게 영세를 권고한 사람은 권철신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하고 있던 이벽(李檗)이었다. 이승훈이 사신행차를 따라 북경으로 떠날 때에 이벽이 비밀리에 이승훈을 만나, 북경에는 천주당(天主堂)이란 곳이 있고 천주당에는 서양 선비로서 전교하는 이가 있다고 하니, 그를 찾아보고 영세를 청하는 한편 신경(信經) 한부와 서양의 물건들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수십 종의 천주교 관련 서적과 묵주, 상본 등을 얻어 가지고 1784년 3월말에 아버지 일행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사도 성 베드로와 같은 '사람 낚는 어부'의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여, 수표교(水標橋)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자 요한'으로 세례를 주는 한편 이벽, 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실의(天主實義) 같은 책을 탐독하여 천주교를 연구한 후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전교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 영세자들과 함께 열심 수계하고 주일과 첨례를 지키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니 이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태어난 지 1년만에 첫 시련에 봉착했다. 1785년(乙巳, 正祖9年) 봄 이승훈, 권일신, 상문(相問) 부자, 이벽, 정약전과 그의 두 동생, 최인길(崔仁吉), 김범우(金範禹) 등 수십 명이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에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던 중 형조(刑曹)의 금리(禁吏)가 그 앞을 지나가다 노름방으로 의심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집회 참석자들을 거동이 수상한 자로 체포하여 거기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과 화상(畵像)과 그 밖의 물건들과 함께 형조로 압송하였다.
그들을 심문한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이승훈 등은 신분이 사대부(士大夫)라 하여 훈방하고 집회장소 제공자이며 역관(譯官) 집안 출신인 중인(中人) 신분의 김범우 한 사람만 옥에 가두고 배교를 강요하였다. 혹형을 가해도 김범우가 배교를 거부하자 경상도 밀양(密陽) 단장(丹場)으로 귀양을 보냈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을 하다 1786년 형조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추적발(乙巳秋摘發)' 인데 이 사건의 풍파가 가라앉자 1786년(丙午, 正祖10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고해성사를 보는 일을 의논한 끝에 신자들이 서로 성사를 보도록 결정하고, 갑(甲) 은 을(乙) 과 병(丙)에게 고해를 하되 갑과 을 또는 을과 병은 서로 고해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 신앙공동체는 이승훈에게 미사성제와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주교, 신부의 권한을 위임하였고, 이승훈은 다른 지도자 10명(이벽, 권일신, 최창현, 홍낙민, 이존창, 유항검 등)을 신부로 임명함으로써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가 설정되었다.
교회도 하나의 단체인 만큼 일정한 조직체계가 필요함은 당연하였고, 이에 따라 이승훈이 북경 교회에서 본 대로 교계(敎階), 즉 성직단(聖職團)을 조직하게 된 것인데 이는 물론 교회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가성직제도는 1787년까지 2년간 계속되다가 신부의 한 사람인 유항검(柳抗儉)이 《청 캬오 유아 야오》(Cheng Kiao Iva yao)란 책을 읽고 가신부(假神父, 평신도)들의 성사 집전이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중단하였다.
그리고 나서 1789년(乙酉, 正祖13년) 10월 한국 교회는 이승훈의 제안으로 여러 가지 궁금증에 대해 문의하고 또한 교회설정을 보고할 겸 예비신자 윤유일(尹有一)을 북경 교회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때 윤유일은 가성직제도의 잘못에 대해 고백하는 이승훈의 편지를 휴대했다. 그 무렵 한국교회는 5년간 놀랍게 발전하여 전국의 신자수가 천명에 달하고 있었다.
윤유일은 천신만고 끝에 1789년 12월 북경에 도착하여 이승훈의 편지를 그 곳 선교사에게 전하는 한편 이듬해 2월 9일 판지(Panzi) 수사를 대부로 하여 북당 선교단장이며 라자리스트 회원인 로오(Raux) 신부로부터 조건부 세례를 받고(세례명 바오로), 조상제사를 금할 것과 가성직제도의 잘못에 대해 상등통회(上等痛悔) 할 것과 성사 받을 방법을 강구하라는 로오 신부와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받아 가지고 무사히 돌아왔다.
윤유일이 미처 여독을 풀 사이도 없이 1790년 7월 이승훈 등 교회 지도자들은 마침 그 때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의 80회 탄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행차 편에 윤유일과 우(禹)요한을 재차 북경에 파견하여 신부를 파견해 주도록 다시 요청하였다.
북경으로의 2차 밀사 파견에 앞서 1787년(丁未, 正祖11년) 10월 이승훈과 정약용, 진사 강이원(姜履元) 등이 반촌(泮村) 김석태(金石太) 집에서 과거공부를 핑계로 젊은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같은 성균관 유생 이기경(李基慶)이 발견하고 성균관에서 성토하고 나섰다. 이른바 '정미 반촌회(丁未 泮村會)'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이승훈은 또 한 차례의 곤욕을 치렀다.
1) 평택현감 이승훈(베드로)의 성묘불배 사건
2차 북경 길에 나선 윤유일(바오로)이 출발한 직후인 1790년 10월 이승훈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2월에는 서부도사(西部都事)로 4개월간 재임한 후 1791년(辛亥, 正祖15년) 6월 24일 평택현감(平澤縣監)이 되어 충청도로 내려갔다.
이승훈의 평택현감 재직기간은 매우 짧았다.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등 교우들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려 큰 파문을 일으킨 데다 정원(政院)에서 1785년의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 재론되고 또 의금부(義禁府)에서 홍낙안(洪樂安)의 문계(問啓)를 인용하여 이승훈을 구서사(購書事), 간책사(刊冊事) 등에 관련된 죄목으로 거론함으로써 1791년 11월 8일 재임 4개월 여만에 평택 현감직을 삭탈 당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792년(壬子, 正祖16년)에는 이승훈이 평택현감으로 재직할 때 평택 향교(鄕校)의 문묘(文廟)라고도 하는데, 공자(孔子)를 받드는 사당을 말한다.
이른바 평택현감 이승훈의 '성묘불배(聖廟不拜)'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내용인즉 한 고을에 수령이 부임하면 3일 내에 성묘에 분향 배례하는 것이 관례요 불문율인데, 이승훈은 보름이 지나도록 그것을 하지 않았고, 향교에 비가 새자 비로소 봉심(奉審)은 하였으나 봉심 때는 배례를 하지 않는다는 고규(故規)를 들어 이 때도 배례를 하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분묘는 객사리(현 팽성읍 객사리)에 있었다.
이승훈이 문묘에 배례를 하지 않자 평택 유생 조상본(趙常本), 권위(權瑋), 정언택(鄭彦宅) 등 삼정사(三正士)가 성균관에 연명으로 통문을 보내 이승훈의 죄상을 성토하고 나섰다.
고을 수령이 관례를 어기고 공자의 사당에 배례하지 않는 행위는 그 시대에 있어서는 죽음을 면치 못할 대죄에 해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고 상소까지 하자 조정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1792년 2월 안핵어사(按핵御使)를 평택에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안핵어사로 파견된 김희채(金熙采)는 이승훈의 친척(재종매부)으로서 이승훈을 두둔하기 위해 이승훈이 성묘에 배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례를 한 것처럼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는 한편 이승훈이 배례를 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한 평택 유생들을 오히려 관장 무고죄로 몰아 엄형에 처하였다.
2) 이승훈(베드로)의 순교
북경 주교 구베아는 한국 교회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1794(甲寅, 正祖 18)년 12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주 신부는 이듬해 1월 서울에 들어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은신하여 4천 여명의 우리 교우들을 사목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주 신부의 입국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그 씨는 그가 이미 오래 전에 뿌려놓은 것이었다.
1795(乙卯, 正祖 19)년 6월 주문모 신부의 이른바 실포(失捕) 사건 때 주 신부의 국내 영입에 관여한 윤유일, 최인길, 지황(池璜) 등이 잡혀 순교하였다. 이 사건으로 한동안 잠잠했던 척사(斥邪) 운동이 재연되었고, 그 여파로 이승훈은 충청도 예산(禮山)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풀려났다.
1800년 6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펴오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김대비(金大妃) 정순왕후(貞順王后)가 11세의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고 그해 12월부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주문모 신부 등이 순교한 신유(辛酉)박해이다.
김 대비로 말하면 본래 노론벽파(老論僻派)로서 남인시파(南人時派) 사람들이 정적(政敵)이었으므로 집권하자마자 남인시파를 일망타진하는 한편 남인시파에 속하는 천주교인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게 된 것이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이란 천주교인 색출 방법도 이때 생겼다.
그리하여 1801(辛酉, 純祖 1)년 2월 10일 이승훈도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6차에 걸친 심문을 받고 그 달 26일(음력) 그의 집(반석방)에서 가까운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필공, 최창현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이승훈의 시신은 그의 여종 이갑례에 의하여 경기도 부천군 남동 만수리(富川郡 南洞 萬壽里)20) 반주골로 옮겨져 매장되어 있다가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李炳奎 베드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장위원회 주관으로 181년만에 파헤쳐졌는데, 이때 무덤에서 ‘成均館進士李公承薰墓’(성균관 진사 이공 승훈묘)란 사발이 나와 그 동네 사람들이 ‘목없는 묘’라 부르던 묘가 이승훈의 묘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튿날(11월 29일) 천진암 성역화위원회가 유골을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여 한국 교회 창립 선조 묘역의 이벽 묘소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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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26, 2017
계성국민학교: 성모의 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나는 모든 걱정이 없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들은 허물없이 무조건 좋은 친구다. 지금은 사회에서 야물딱지하게 한가락식 한다며 고상한척해도 나는 다 안다. 그 옛날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고 한없이 순진하고 착하고 꼬흘리개로 띨하게 살았다는 사실. 동심의 세계가 좋아서 지금도 나는 밝은 표정으로 호의를 베풀면서 띨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상적으로 속셈없이 순수한 사람으로 살수있으면 좋겠다.
Friday, August 11, 2017
Irvine Judo Club
유도에 관심을 갖고 유도를 배우고자 저희 체육관에 입관하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와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유도는 1909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서 '독립 운동에 절대 필요한 장정 100명을 육성하자' 라는 계기로 시작됐습니다. 유도는 '유능제강'으로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작은 사람이 큰사람을 메칠 수있고 힘이 약한 사람이 힘이 강한 사람을 극복할수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수련을 하시다 보면 아시게 되지만, 유도는 절대로 수월한 운동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기술을 걸고 메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체력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며 또한 기술을 하나씩 배우고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땀을 흘리는 노력의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판으로 승부가 좌우되고, 땀을 흘리는 노력이 필요하고, 인생과 비슷한 운동이군요.
남녀노소 할것없이 누구나 배울수 있는 운동이므로 땀을 흘리는 순간을 두려워 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시작할 때에는 전체의 절반을 이루어 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심성의껏 지도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얼바인 유도 체육관
다니엘 관장
We teach Judo because we want young people to be strong physically and mentally, yet be compassionate and are capable of making the contribution to the world. We place your child's development ahead of everything else. Under the watchful guidance of senseis, your child will learn to handle challenges—both on and off the mat—leaving you amazed at their transformation. Just ask anybody :)
Judo is an Olympic sport. It was founded in 1882 by Professor Jigoro Kano, the Minister of Education in Japan. Dr. Kano envisioned it as a way of becoming physically and mentally fit through disciplined training. It is designed so that it can be practiced by all ages, both male and female. Judo, which means 'Gentle Way', does not involve any kicking or striking techniques. It is an excellent activity to increase physical fitness, and self-esteem.
Judo students go on to achieve success in every field. The life lessons learned at dojo carry to their success. At Irvine Judo Club, we believe everyone will become elite at whatever they choose to do in life.
Our elite student athle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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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 www.IrvineJudo.com
Sunday, July 23, 2017
Judo Black Belt

People often tell me getting a black belt in Judo seems harder than other disciplines. I can not disagree. A part of earning a black belt is possessing physical and mental toughness yet having the compassionate heart to care for others which can only be best achieved through time and experience. Rarely possible until having experienced life. We call that maturity.
Judo is translated as the 'gentle way', but it's a different type of 'gentle' than the ones you may know. I am not going to lie. Judo is always done in full contact, and 'pain' is a constant companion. You get slammed, launched, bruised, twisted, knotted, choked and pinned. But along the way, you develop the mental and physical toughness needed in life. The side effect of Judo is you get to be in phenomenal shape.
One unique aspect of Judo experience includes a simulated duel called Randori. The randori allows you to train the techniques at near 100% speed. This is how a beautiful Ippon throw is possible; seemingly effortless launching of an opponent's body in the air, because you have done it a ten thousand times before.
If the training is not hard enough, Judo still has other challenges greater than yourself. I don't believe anyone truly enjoys losing. It is the way quickly rebound from losing are true life lessons. The challenge comes at you in a form of strong opponents you could never ever beat. No matter how much you train and how much stronger you think you've gotten, there is always that one person...
Hopefully, by now you can see that Judo has almost nothing to do with getting a black belt. If you found interest in Judo, and have the will to overcome such life challenges, you will have become a better person for it; salt of the earth. Because after having done Judo, everything else seems easy.
Thursday, June 29, 2017
Olympic Gold Medalist
운동 종목마다 팬들을 돌아 버리게 하는 소리가 있다. 골프는 '홀인원', 축구는 '고오오오오올', 미식축구는 '터치다운' 이다. 유도에도 유도의 소리가 있다. 바로 '입뽄/한판'이다.
유도하는 사람들은 '한판' 때문에 뼈를 갈고 훈련을 한다. 선수 생활이 끝나면 코치로, 코치생활이 끝나면 심판으로, 심판생활이 끝나면 사범으로 평생 사서 고생한다. 이렇게 힘들게 오래해야 하는 유도는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똘똘 뭉쳐있다. 진화와 진보가 불가능한 조직이다.
이런 유도 세계에서도 스타트업 정신으로 국제 유도 연맹의 마인드을 뜯어 고친 사람이 있다. 이 스토리는 이원희 선수와 마카로프 선수 금메달 결승전 심판을 본 사이토 선생 (Noboru Saito) 의 이야기이다.

국보급 유도 선수 이원희 (Lee Won Hee) 는 2004년 아테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지금 이원희 선수는 한국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고 있고 은메달리스트 마카로프 (Vitaliy Makarov) 선수는 러시아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안 알려진 유도 심판의 절대적인 권력에 대해서 설명한다. 시합장내는 심판의 신성한 구역이다. 그 아무도 심판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유도 시합을 보면 시작 전에 선수들이 시합장 한참 저쪽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시합장으로 다가 와도 된다는 심판의 허락을 기다리는 것이다. 심지어 부심도 시합장 바깥에서 심판을 보고 의사도 심판의 허락후 치료할수 있다.
이런 막강한 권력의 사이토 선생은 이원희 선수에게 한판승을 선사한다. 이원희 선수가 9초 남기고 건 마지막 기술은 시합장외로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건 기술이다. 원래 유도 룰상 시합장외로 나간 기술은 무조건 무효다. 아무리 이원희 선수가 이기는것을 바라는 그 누구도 룰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 당시 부심은 무효를 주장했다.

그러나 사이토 선생은 이원희 선수에게 한판승을 주고 꿈쩍도 안하신다. 아... 스캔들이다. 국제 유도연맹도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다. 지혜로우신 선생은 이렇게 해명 한다. '유도는 싸움이다. 두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중 땅에 그은 줄 가지고 유효다 무효다 따지면 유도는 유도가 아니다.' 음... 마카로프 러시아 선수는 예의 바르게 항의를 안한다. 지금도 마카로프 코치는 젊고 혈기 있는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무례한 행동을 보이면 절대로 용납 안하는 예의 바른 무술인이다.
국제 유도 연맹은 사이토 선생의 해명대로 시합장외 무효에 대한 룰을 수정한다. '다만 기술이 계속하고 있는 경우는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라고. 즉 그날 사이토 선생의 지혜롭고 용감한 판정이 오늘의 'dynamic edge rule' 을 탄생시키고 이원희 선수는 2004 아테나 올림픽 '한판승' 금메달리스트로 역사책에 기록된다.
스타트업은... 규제를 잘 알고 그안에서 활동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규제가 틀렸을때는 알아차리는 지혜와 필요에 따라서 룰 밖에서 살수 있는 용감함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사이토 선생과 제자들과 함께)
유도하는 사람들은 '한판' 때문에 뼈를 갈고 훈련을 한다. 선수 생활이 끝나면 코치로, 코치생활이 끝나면 심판으로, 심판생활이 끝나면 사범으로 평생 사서 고생한다. 이렇게 힘들게 오래해야 하는 유도는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똘똘 뭉쳐있다. 진화와 진보가 불가능한 조직이다.
이런 유도 세계에서도 스타트업 정신으로 국제 유도 연맹의 마인드을 뜯어 고친 사람이 있다. 이 스토리는 이원희 선수와 마카로프 선수 금메달 결승전 심판을 본 사이토 선생 (Noboru Saito) 의 이야기이다.
국보급 유도 선수 이원희 (Lee Won Hee) 는 2004년 아테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지금 이원희 선수는 한국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고 있고 은메달리스트 마카로프 (Vitaliy Makarov) 선수는 러시아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안 알려진 유도 심판의 절대적인 권력에 대해서 설명한다. 시합장내는 심판의 신성한 구역이다. 그 아무도 심판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유도 시합을 보면 시작 전에 선수들이 시합장 한참 저쪽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시합장으로 다가 와도 된다는 심판의 허락을 기다리는 것이다. 심지어 부심도 시합장 바깥에서 심판을 보고 의사도 심판의 허락후 치료할수 있다.
이런 막강한 권력의 사이토 선생은 이원희 선수에게 한판승을 선사한다. 이원희 선수가 9초 남기고 건 마지막 기술은 시합장외로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건 기술이다. 원래 유도 룰상 시합장외로 나간 기술은 무조건 무효다. 아무리 이원희 선수가 이기는것을 바라는 그 누구도 룰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 당시 부심은 무효를 주장했다.
그러나 사이토 선생은 이원희 선수에게 한판승을 주고 꿈쩍도 안하신다. 아... 스캔들이다. 국제 유도연맹도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다. 지혜로우신 선생은 이렇게 해명 한다. '유도는 싸움이다. 두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중 땅에 그은 줄 가지고 유효다 무효다 따지면 유도는 유도가 아니다.' 음... 마카로프 러시아 선수는 예의 바르게 항의를 안한다. 지금도 마카로프 코치는 젊고 혈기 있는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무례한 행동을 보이면 절대로 용납 안하는 예의 바른 무술인이다.
국제 유도 연맹은 사이토 선생의 해명대로 시합장외 무효에 대한 룰을 수정한다. '다만 기술이 계속하고 있는 경우는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라고. 즉 그날 사이토 선생의 지혜롭고 용감한 판정이 오늘의 'dynamic edge rule' 을 탄생시키고 이원희 선수는 2004 아테나 올림픽 '한판승' 금메달리스트로 역사책에 기록된다.
스타트업은... 규제를 잘 알고 그안에서 활동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규제가 틀렸을때는 알아차리는 지혜와 필요에 따라서 룰 밖에서 살수 있는 용감함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사이토 선생과 제자들과 함께)
Tuesday, June 27, 2017
Startup Communication
IT 컨설팅 회사는 당연히 엔지니어 출신들을 많이 뽑는다. 필요한 기술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완벽해서 뽑힌 IT 엔지니어들도 소프트 스킬에서 태끌을 많이 당한다. 컨설팅에서는 IT 기술은 hard skills 라고 하고 커뮤니케이션은 soft skills 라고 한다.
IT 컨설팅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의사 소통이다.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IT 엔지니어 출신들은 말수가 적을 확률이 높지만 절대로 성격이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다. 말도 잘하고 야망도 있다. 리포트도 잘 쓰고 이메일도 잘 보낸다. 자세가 잡힌 기업은 기본으로 직원들에게 계속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팀플을 가르친다. 투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고 여긴다.
같은 조건으로 입사한 컨설턴트 중에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는 컨설턴트들은 고객회사에서 임원으로 모셔 가지만 남는 컨설턴트들은 대부분 밑에서 기본적인 일만 하는 평생 컨설턴트로 남는다. 그럼 임원으로 스카웃 돼서 떠나는 친구들은 무엇이 이뻐서 스카웃 돼나?
스카웃 되어서 떠나는 친구들은 일관적인 이메일이나 문자가 '효율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임원의 핵심은 '효과적'인 의사 소통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효율보다 효과를 챙긴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거나 전화를 통한 의사 소통이 '효과적' 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이메일에 중요한 대화를 남기지 않는다. 전화가 오게 하고 전화를 끊임없이 한다. 주요 내부 회의에 꼭 참석한다. 특히 기획 회의는 더더욱.
다른 컨설턴트들이 디지털로 일하는 중 자신들은 아나로그로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잘하면 이런 종류의 재능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인식한다. 이사람은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할수 있다. 모든 단계에서 철저한 준비를 한다.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할수 있는 지혜가 있다. 재치있는 순발력이 있고 장기간 갈수있는 인내심이 있다. 이성과 감성에 밝아 모든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즉 기업의 영웅이고 챔피언이다. 이래서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면 임원으로 스카웃 되고도 남는다. 더 진화됀 친구들은 스타트업을 한다. 기술자가 기술을 배우는것은 당연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인사 관리도 꼭 배워야 한다. 그중 제일은 커뮤니케이션이다.
IT 컨설팅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의사 소통이다.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IT 엔지니어 출신들은 말수가 적을 확률이 높지만 절대로 성격이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다. 말도 잘하고 야망도 있다. 리포트도 잘 쓰고 이메일도 잘 보낸다. 자세가 잡힌 기업은 기본으로 직원들에게 계속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팀플을 가르친다. 투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고 여긴다.
같은 조건으로 입사한 컨설턴트 중에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는 컨설턴트들은 고객회사에서 임원으로 모셔 가지만 남는 컨설턴트들은 대부분 밑에서 기본적인 일만 하는 평생 컨설턴트로 남는다. 그럼 임원으로 스카웃 돼서 떠나는 친구들은 무엇이 이뻐서 스카웃 돼나?
스카웃 되어서 떠나는 친구들은 일관적인 이메일이나 문자가 '효율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임원의 핵심은 '효과적'인 의사 소통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효율보다 효과를 챙긴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거나 전화를 통한 의사 소통이 '효과적' 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이메일에 중요한 대화를 남기지 않는다. 전화가 오게 하고 전화를 끊임없이 한다. 주요 내부 회의에 꼭 참석한다. 특히 기획 회의는 더더욱.
다른 컨설턴트들이 디지털로 일하는 중 자신들은 아나로그로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잘하면 이런 종류의 재능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인식한다. 이사람은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할수 있다. 모든 단계에서 철저한 준비를 한다.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할수 있는 지혜가 있다. 재치있는 순발력이 있고 장기간 갈수있는 인내심이 있다. 이성과 감성에 밝아 모든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즉 기업의 영웅이고 챔피언이다. 이래서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면 임원으로 스카웃 되고도 남는다. 더 진화됀 친구들은 스타트업을 한다. 기술자가 기술을 배우는것은 당연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인사 관리도 꼭 배워야 한다. 그중 제일은 커뮤니케이션이다.
Sunday, June 25, 2017
Lakes of Swiss
한국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스위스에는 호수의 기적이 있다. 모든 알프스 산지 동네들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마을 마이엔펠트(Maienfeld)를 생각하면 된다. 눈이 녹아 봄철에 흐르는 물 춘수는 손가락이 시렵고 붉어도 깨끗하기가 그지없다. 얼음 섞인 춘수는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참하다. 알프스 산맥의 춘수는 흘러서 호수에 모인다.

(Lugano 호수에서)
스위스의 모든 물은 '마실수 있는 물'이다. 수도꼭지 물, 길거리의 분수, 심지어 호수 물도 그대로 마셔도 된다. 스위스의 환경 정책상 물은 저수지에 모인후 수력 발전소에서 전력을 생산한 후 필터링을 통해서 마시는 물이 된다. 이런 수력 전기는 깨끗한 재생 에너지이며 오염을 방출하지 않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없다. 스위스에 유난히 호수가 많고 환경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유의 하나다.

(길거리의 분수대: 그대로 마시면 된다)
26개의 지역정부로 나누어져 있는 스위스는 물이 깨끗한 나라 사람들 처럼 여유있게 서로 존중하며 open trade 를 하고 세금까지도 지역정부에서 자유롭게 정한다. 모국어는 Hochdeutsch (Swiss Standard German) 이지만 독일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지역정부들이 마음대로 공식언어로 정해서 쓰고 있다.
스위스의 자유는 정치인들이 쓴 헌법 때문이 아니고 깨끗한 물을 인간의 기본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직접 국민 투표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자연적인 진화이다. 대통령이 없는 대신 수석의원들이 매년 바뀌면서 국가의 원수역활을 한다. 국가 정책을 간단한 국민 투표로 결정 할수 있어 '촛불시위'까지 안 간다.
(스타트업 공장 University of Zurich 에서)
스위스는 startup friendly 이다. 정부의 규제가 적다는 뜻이다. 정부 지원이 없어도 규제가 적으면 스타트업은 잘 자란다. 알버트 아인스타인의 Universität Zürich (University of Zurich) 대학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스타트업을 아침 저녁으로 뿜어낸다. 아무리 기술에 자신이 있어도 자유 시장에서 안되는 스타트업은 빨리 접고 방향을 잘 잡아 살아남는 스타트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싼맛에 사먹는 버거킹이 이만원이니 스타트업이 잘 안되면 실속있게 빨리 접는다.

(Franklin University Switzerland 에서)
스위스는 무조건 지상의 천국은 아니다. 물가가 비싸다. 서울의 1.5배 부터 2배로 비싸다고 보면 된다. 예로 루가노 스위스 에서 밀라노 이태리는 기차로 1시간 거리이다. 주말에는 루가노에서 이만 오천원짜리 스파게티 먹는것보다 밀라노가서 오천원짜리 스파게티 먹고 쇼핑하고 '돈 벌어' 온다.
스위스의 지리는 알프스 산이 요새다. 방위용 땅굴에서 포탄과 전투기가 날아갈 수 있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스위스로 오는 모든 길을 차단할수 있다. 스위스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전쟁 준비가 철저히 돼있는것 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스위스 예비군은 기관총이 자동 배급되는데 요즘 평화주의 젊은층은 기관총 소유를 거절한다. 지리도 지리지만 스위스의 중립이 진짜 가능한 이유는 은행에는 전세계의 부가 싸여있다는 것이다. 어떤 리더들은 자기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기 개인 재산이 비밀리 싸여있는 스위스가 망하는 것은 용납 못 할것이다.

(실명 계좌와 문 바깥고리가 없는 은행)
유럽에는 스위스처럼 신기한 나라들이 몇군데 더있다. 우리는 그들을 막연히 살기가 좋은 나라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의 시작은 '깨끗한 물'과 '스타트업'을 기본권리로 중요시하는 데서 왔다. 살기가 좋아지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있으면 적성에 맞는 공부를 골라 할수 있고 흥이 나서 연구한 기술이 완성되면 스타트업을 한다. 스타트업의 질이 매우 높을수 밖에 없다.

(유도 국제심판으로 활동할때)
스위스 운동 이야기이다. 스위스.독일 유도는 세계에서 알아준다. 물론 유도 애기도 많지만 이번에는 스위스의 고유의 운동 씨륑 (schwingen) 이다. 두 사람이 바지 허리춤 샅바를 잡고 힘과 슬기를 겨루어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경기이다. 기술도 발음도 아무리 봐도 한국의 씨름이다. 잡아보면 확실히 씨름.유도기술이 나온다. 모래밭 대신 톱밥위에서 한다. 씨름이 스위스로 보급 된 것처럼 깨끗한 물 마인드와 자유로운 스타트업 문화가 한국으로 보급 됐으면 좋겠다.

(스위스 고유의 운동 Schwingen, 우리의 씨름이다)

(Lugano 호수에서)
스위스의 모든 물은 '마실수 있는 물'이다. 수도꼭지 물, 길거리의 분수, 심지어 호수 물도 그대로 마셔도 된다. 스위스의 환경 정책상 물은 저수지에 모인후 수력 발전소에서 전력을 생산한 후 필터링을 통해서 마시는 물이 된다. 이런 수력 전기는 깨끗한 재생 에너지이며 오염을 방출하지 않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없다. 스위스에 유난히 호수가 많고 환경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유의 하나다.

(길거리의 분수대: 그대로 마시면 된다)
26개의 지역정부로 나누어져 있는 스위스는 물이 깨끗한 나라 사람들 처럼 여유있게 서로 존중하며 open trade 를 하고 세금까지도 지역정부에서 자유롭게 정한다. 모국어는 Hochdeutsch (Swiss Standard German) 이지만 독일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지역정부들이 마음대로 공식언어로 정해서 쓰고 있다.
스위스의 자유는 정치인들이 쓴 헌법 때문이 아니고 깨끗한 물을 인간의 기본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직접 국민 투표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자연적인 진화이다. 대통령이 없는 대신 수석의원들이 매년 바뀌면서 국가의 원수역활을 한다. 국가 정책을 간단한 국민 투표로 결정 할수 있어 '촛불시위'까지 안 간다.
(스타트업 공장 University of Zurich 에서)
스위스는 startup friendly 이다. 정부의 규제가 적다는 뜻이다. 정부 지원이 없어도 규제가 적으면 스타트업은 잘 자란다. 알버트 아인스타인의 Universität Zürich (University of Zurich) 대학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스타트업을 아침 저녁으로 뿜어낸다. 아무리 기술에 자신이 있어도 자유 시장에서 안되는 스타트업은 빨리 접고 방향을 잘 잡아 살아남는 스타트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싼맛에 사먹는 버거킹이 이만원이니 스타트업이 잘 안되면 실속있게 빨리 접는다.

(Franklin University Switzerland 에서)
스위스는 무조건 지상의 천국은 아니다. 물가가 비싸다. 서울의 1.5배 부터 2배로 비싸다고 보면 된다. 예로 루가노 스위스 에서 밀라노 이태리는 기차로 1시간 거리이다. 주말에는 루가노에서 이만 오천원짜리 스파게티 먹는것보다 밀라노가서 오천원짜리 스파게티 먹고 쇼핑하고 '돈 벌어' 온다.
스위스의 지리는 알프스 산이 요새다. 방위용 땅굴에서 포탄과 전투기가 날아갈 수 있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스위스로 오는 모든 길을 차단할수 있다. 스위스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전쟁 준비가 철저히 돼있는것 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스위스 예비군은 기관총이 자동 배급되는데 요즘 평화주의 젊은층은 기관총 소유를 거절한다. 지리도 지리지만 스위스의 중립이 진짜 가능한 이유는 은행에는 전세계의 부가 싸여있다는 것이다. 어떤 리더들은 자기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자기 개인 재산이 비밀리 싸여있는 스위스가 망하는 것은 용납 못 할것이다.

(실명 계좌와 문 바깥고리가 없는 은행)

(유도 국제심판으로 활동할때)
스위스 운동 이야기이다. 스위스.독일 유도는 세계에서 알아준다. 물론 유도 애기도 많지만 이번에는 스위스의 고유의 운동 씨륑 (schwingen) 이다. 두 사람이 바지 허리춤 샅바를 잡고 힘과 슬기를 겨루어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경기이다. 기술도 발음도 아무리 봐도 한국의 씨름이다. 잡아보면 확실히 씨름.유도기술이 나온다. 모래밭 대신 톱밥위에서 한다. 씨름이 스위스로 보급 된 것처럼 깨끗한 물 마인드와 자유로운 스타트업 문화가 한국으로 보급 됐으면 좋겠다.

(스위스 고유의 운동 Schwingen, 우리의 씨름이다)
Saturday, June 24, 2017
KAIST professor
인천에서 LA행 비행기를 기다린다. 한국에서 나의 마지막 미팅은 KAIST 공과 교수이다. 오래간만에 들어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던 기술의 소유자이다. 그 훌륭한 기술로 스타트업을 하실 계획이다. 상당히 많은 준비 중이다. 여러군데서 펀딩을 하려고 하고 도움이 구름처럼 모이고 있다고 한다.
KAIST 교수는 암행어사이고 KAIST 명함은 마패라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 안에서 KAIST 명함을 내세우고 '스타트업 암행어사 출도요!' 하면 아무도 꼼짝 못할 것이다. 우선 나도 공감이 가고 뭔가 보이는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수준 높으신 분이 빅픽처 고민, 꼼꼼한 따짐, 핵심적인 질문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끄떡거리며 진지한 경청 모드이지만 사실 혁신적으로 바뀌는 스타트업 세계는 현역 사람들이 더 잘안다. 나의 실리콘 밸리 경험은 내 체질에만 맞는 맞춤 경험이다. 실리콘 밸리 에서의 진실은 서울에서는 진실이 아닐수도 있고 한 시절의 진실도 유행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유행이 바꿔도 안 변하는 문제들은 돈과 사람 문제들이다. 돈과 사람은 경영학 쪽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다. 돈은 펀딩을 받아 해결하고 사람은 고용해서 쓰면 된다고 한다. 이래서 배운 지식만으로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홀딱 망한다. KAIST 교수도 이런 슬픈 데이타 포인트를 많이 알고 있다. 교수의 특별한 기술에 나의 경영 방식을 스타트업 마인드가 있는 직원들과 돈을 엄청 벌면서 재미있게 돌리면 어느 순간 엑시트의 영광이 오지 않을까? 가 미팅의 핵심이다.
미국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특이하게 '조만간' 이라는 단어를 안 쓰셨다. 기대된다. 기내 메뉴가 복잡하게 보인다.
KAIST 교수는 암행어사이고 KAIST 명함은 마패라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 안에서 KAIST 명함을 내세우고 '스타트업 암행어사 출도요!' 하면 아무도 꼼짝 못할 것이다. 우선 나도 공감이 가고 뭔가 보이는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수준 높으신 분이 빅픽처 고민, 꼼꼼한 따짐, 핵심적인 질문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끄떡거리며 진지한 경청 모드이지만 사실 혁신적으로 바뀌는 스타트업 세계는 현역 사람들이 더 잘안다. 나의 실리콘 밸리 경험은 내 체질에만 맞는 맞춤 경험이다. 실리콘 밸리 에서의 진실은 서울에서는 진실이 아닐수도 있고 한 시절의 진실도 유행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유행이 바꿔도 안 변하는 문제들은 돈과 사람 문제들이다. 돈과 사람은 경영학 쪽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다. 돈은 펀딩을 받아 해결하고 사람은 고용해서 쓰면 된다고 한다. 이래서 배운 지식만으로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홀딱 망한다. KAIST 교수도 이런 슬픈 데이타 포인트를 많이 알고 있다. 교수의 특별한 기술에 나의 경영 방식을 스타트업 마인드가 있는 직원들과 돈을 엄청 벌면서 재미있게 돌리면 어느 순간 엑시트의 영광이 오지 않을까? 가 미팅의 핵심이다.
미국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특이하게 '조만간' 이라는 단어를 안 쓰셨다. 기대된다. 기내 메뉴가 복잡하게 보인다.
설릉 춘수
Thursday, June 22, 2017
Art of War
속셈없이 살고 싶어도 내가 노력을 안하면 별 뽀족한 수가 없다. 이놈의 사회가 협조를 안해주기 때문이다. 악의적인 의도로 무엇을 빼앗을 속셈으로 접근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이들의 특이함은 주무기가 힘이나 실력이 아니고 아첨이다. 아첨을 해서 환심을 산다는 행동은 거지근성에 의한 행동 중 하나이다. 뭔가를 공짜로 얻어보려는 의도적인 행동이다. 자신의 정의감과 인간미를 버리고 환심 얻기에 몰두하는 거지무리들을 조심해야 된다.
진나라의 중행 문자라는 사람이 망명을 가다가 현이라는 고장을 지나친다. 그때 부하 중 한 사람이 "이곳 사람 아전은 공께서 아는 사람입니다, 잠시 쉬고 가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중행 문자가 대답 한다. "내가 일찍이 음악을 좋아할때 아전이 그것을 알고 소리가 잘 나는 피파를 보내 주더구나" "또 내가 패물을 좋아했을 때, 둥근 옥을 보내 주었다." "아전의 속 뜻은 단지 내 환심을 사는 것이 목적이며 나의 허물을 조장하는 자이다." "내 환심을 사 등용되려는 자이니 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할까봐 두렵다" 중행 문자는 지체하지 않고 그 지방을 지나쳤다. 아전은 그를 잡아서 군주의 환심을 사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 속은 알수 없어 속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구별이 가능할때는 너무 늦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개나 족보 없이 접근하는 자는 사기꾼이라고 간주하고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것이 관계론 중심 우리 사회의 모순이다. 진짜 속셈이 있는 자는 가짜라도 족보가 반듯하고 절대로 소개 없이 접근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속셈없고 순진한 사람들 하고만 관계를 맺지 않는것이고 진짜 사기꾼들은 계속 맴돈다.
이들은 안전한 도피 거리에서 웃음으로 알랑 거린다. 이 웃음은 밝은 웃음이 아닌 눈 웃음이고 입꼬리에 비웃음이 머물러 있다. 모든 행동이 조작된 전략적인 행동이다. 말은 잘해서 항상 칭찬같이 들리는 아첨을 해주어서 기분이 너무 좋다. 대단한 감언이설로 우리가 마치 대단한 사람것 처럼 세워준다. 우리를 세워야 우리를 팔아먹을때 자신의 가치가 상승한다. 허물없이 친한척 하며 어장관리를 한다.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고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호감이 간다. 인기에 애민해서 이미지 관리에 도사다. 관계의 영양가를 수학적으로 따진다. 항상 소개를 잘 시켜주고 자기가 필요한 소개는 고려치 않고 요구한다. 이렇게 소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득을 양쪽에서 챙긴다. 사람들은 전략적으로 중립적인 이들을 아군으로 만들려고 많은 이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좋은 뜻으로 모이는 모임일수록 이런 무리들은 똥파리처럼 와서 한자리식 한다. 헌팅하러 오는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 특별한 기술없이 모든 관계가 무난하고 인기로 버티는 힘이 있는 사람은 의심을 해도 된다. 스타트업도 성공성장 할때 피해 갈수 없는 암 세포이다. 이들은 속내가 밝혀지면 교묘히 결백을 주장하는 작업을 하다 수습이 안되면 슬그머니 관계를 끝낸다.
그래서 손자는 이런 조언을 했다. '적의 속내를 알면 두려울것이 없다.'
진나라의 중행 문자라는 사람이 망명을 가다가 현이라는 고장을 지나친다. 그때 부하 중 한 사람이 "이곳 사람 아전은 공께서 아는 사람입니다, 잠시 쉬고 가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중행 문자가 대답 한다. "내가 일찍이 음악을 좋아할때 아전이 그것을 알고 소리가 잘 나는 피파를 보내 주더구나" "또 내가 패물을 좋아했을 때, 둥근 옥을 보내 주었다." "아전의 속 뜻은 단지 내 환심을 사는 것이 목적이며 나의 허물을 조장하는 자이다." "내 환심을 사 등용되려는 자이니 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할까봐 두렵다" 중행 문자는 지체하지 않고 그 지방을 지나쳤다. 아전은 그를 잡아서 군주의 환심을 사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 속은 알수 없어 속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구별이 가능할때는 너무 늦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개나 족보 없이 접근하는 자는 사기꾼이라고 간주하고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것이 관계론 중심 우리 사회의 모순이다. 진짜 속셈이 있는 자는 가짜라도 족보가 반듯하고 절대로 소개 없이 접근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속셈없고 순진한 사람들 하고만 관계를 맺지 않는것이고 진짜 사기꾼들은 계속 맴돈다.
이들은 안전한 도피 거리에서 웃음으로 알랑 거린다. 이 웃음은 밝은 웃음이 아닌 눈 웃음이고 입꼬리에 비웃음이 머물러 있다. 모든 행동이 조작된 전략적인 행동이다. 말은 잘해서 항상 칭찬같이 들리는 아첨을 해주어서 기분이 너무 좋다. 대단한 감언이설로 우리가 마치 대단한 사람것 처럼 세워준다. 우리를 세워야 우리를 팔아먹을때 자신의 가치가 상승한다. 허물없이 친한척 하며 어장관리를 한다.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고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호감이 간다. 인기에 애민해서 이미지 관리에 도사다. 관계의 영양가를 수학적으로 따진다. 항상 소개를 잘 시켜주고 자기가 필요한 소개는 고려치 않고 요구한다. 이렇게 소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득을 양쪽에서 챙긴다. 사람들은 전략적으로 중립적인 이들을 아군으로 만들려고 많은 이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좋은 뜻으로 모이는 모임일수록 이런 무리들은 똥파리처럼 와서 한자리식 한다. 헌팅하러 오는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 특별한 기술없이 모든 관계가 무난하고 인기로 버티는 힘이 있는 사람은 의심을 해도 된다. 스타트업도 성공성장 할때 피해 갈수 없는 암 세포이다. 이들은 속내가 밝혀지면 교묘히 결백을 주장하는 작업을 하다 수습이 안되면 슬그머니 관계를 끝낸다.
그래서 손자는 이런 조언을 했다. '적의 속내를 알면 두려울것이 없다.'
Wednesday, June 14, 2017
I broke Google Translate
한국어 블로그 쓰면서 한국말 쓰기가 많이 늘었다. 내 블로그를 구글 번역기를 통해 읽던 외국 친구들이 요즘은 번역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또박또박 써서 구글번역기로 번역이 잘되던 글이 점점 번역이 이상해 진다는 것이다. 구글번역기 AI가 흐름이 예측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장들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내글을 새로 학습하는 대신 번역을 거부했을것이다.
IT consulting
본좌의 회사는 소프트웨어 회사면서도 매출의 절반이상이 IT 컨설팅에서 왔다. 소프트웨어 라이센스를 판후 다음 8방면에서 매출을 뽑는다.
매출의 출처는
0) software license
1) IT strategy
2) installation
3) configuration
4) implementation
5) customization
6) training
7) operation
8) software license renewal
우리회사의 제품은 기업용 B2B 인사자본관리 소프트웨어이다. 주고객은 대기업인데 대기업 임원들은 승부욕이 높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아 자기회사 맞춤용 소프트웨어를 필수로 한다. 소프트웨어 가지고도 승부를 줘어 짜는 사람들이다.
한국 대기업은 되도록이면 신직원들을 모아놓고 '하면 된다' 정신으로 모든것을 사내에서 해결하는것을 좋아하지만 전문가 핵심역량의 장점을 이해하는 다국적 대기업은 전문적 소프트웨어에 돈을 쓰는걸 아까워하지 않는다. IT 컨설팅은 배우면서 돈 벌면서 우리 회사를 키우는 최고의 비법이다. IT 컨설팅: 돈받고 배우는 비법 순서는,
1) 우리만의 전문기술로 시작한다. 본좌의 기술은 콤퓨터와 경영이다. 그중에도 인사자본관리를 연구했다. 간단한 두기술이지만 합치면 희귀한 융합기술이 된다. 콤퓨터 프로가 인사자본관리 프로일 확률은 적다.
2) 대기업에 고가에 판다. 예산이 있는 고객만이 고가에 사갈수 있다.
3) 예산이 있는 대기업은 customization 을 아낌없이 부탁한다. 최고의 customization을 위해 각 대기업은 자기의 경영비밀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컨설팅의 첫 단추는 프리세일 (pre-sale) 이다. 프리세일은 영업을 하기 위해서 영업전에 하는 영업만큼 중요한 준비이다. 프리세일을 잘해야 영업으로 이어진다. 전략 컨설팅에서 나오는 전략과 기업의 용량을 비교하는 fit/gap analysis 후에 미약한 부분을 분석하여 첨담기술을 추천한다. Build or buy decision analysis 와 capital budgeting 도 한다.
프리세일이 잘되면 IT 컨설팅의 필요성을 클라이언트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이사회가 우리를 추천하면 CEO가 계약고용하는 방식이다. CFO가 컨설팅예산을 짜고 CTO가 함께 기술결정을 내린다. 이런 빽으로 들어온 우리는 모든 임원들과 면담을 할수 있고 모든 데이터를 볼수 있다. 귀족대우를 받고 일한다.
아주 가끔 상황파학이 안되는 주니어 임원은 바쁘다면서 협조를 안할때가 있다. 임원이 협조를 안해도 괜찮다. 사실상 임원과의 면담은 형식상이다. 임원 위선 세워주기 눈가림이다. 컨설턴트는 super user 로 데이터를 시스템에서 직접 수집 분석한다. 아주 짧은시간 안에 임원만큼 정확히 부서의 과거, 현재, 미래를 파학할수있다.
수집된 데이타로 data scrubbing을 해서 knowledge pool이 만들면 기술지원/투자 필요 분야가 보인다. 부서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하면 임원의 미래 성과도 예측 할수있다. 임원의 미래 성과예측은 연봉 스탁옵션 보너스 결정때 큰역활을 한다. 이런 이치를 아는 노련한 임원들은 (대부분 컨설턴트출신) 컨설턴트한테 베리베리 나이스하다. 컨설턴트는 현대판 암행어사다. 주니어 임원은 아직 마패 맛을 못본것 뿐이다.
매출의 출처는
0) software license
1) IT strategy
2) installation
3) configuration
4) implementation
5) customization
6) training
7) operation
8) software license renewal
우리회사의 제품은 기업용 B2B 인사자본관리 소프트웨어이다. 주고객은 대기업인데 대기업 임원들은 승부욕이 높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아 자기회사 맞춤용 소프트웨어를 필수로 한다. 소프트웨어 가지고도 승부를 줘어 짜는 사람들이다.
한국 대기업은 되도록이면 신직원들을 모아놓고 '하면 된다' 정신으로 모든것을 사내에서 해결하는것을 좋아하지만 전문가 핵심역량의 장점을 이해하는 다국적 대기업은 전문적 소프트웨어에 돈을 쓰는걸 아까워하지 않는다. IT 컨설팅은 배우면서 돈 벌면서 우리 회사를 키우는 최고의 비법이다. IT 컨설팅: 돈받고 배우는 비법 순서는,
1) 우리만의 전문기술로 시작한다. 본좌의 기술은 콤퓨터와 경영이다. 그중에도 인사자본관리를 연구했다. 간단한 두기술이지만 합치면 희귀한 융합기술이 된다. 콤퓨터 프로가 인사자본관리 프로일 확률은 적다.
2) 대기업에 고가에 판다. 예산이 있는 고객만이 고가에 사갈수 있다.
3) 예산이 있는 대기업은 customization 을 아낌없이 부탁한다. 최고의 customization을 위해 각 대기업은 자기의 경영비밀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컨설팅의 첫 단추는 프리세일 (pre-sale) 이다. 프리세일은 영업을 하기 위해서 영업전에 하는 영업만큼 중요한 준비이다. 프리세일을 잘해야 영업으로 이어진다. 전략 컨설팅에서 나오는 전략과 기업의 용량을 비교하는 fit/gap analysis 후에 미약한 부분을 분석하여 첨담기술을 추천한다. Build or buy decision analysis 와 capital budgeting 도 한다.
프리세일이 잘되면 IT 컨설팅의 필요성을 클라이언트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이사회가 우리를 추천하면 CEO가 계약고용하는 방식이다. CFO가 컨설팅예산을 짜고 CTO가 함께 기술결정을 내린다. 이런 빽으로 들어온 우리는 모든 임원들과 면담을 할수 있고 모든 데이터를 볼수 있다. 귀족대우를 받고 일한다.
아주 가끔 상황파학이 안되는 주니어 임원은 바쁘다면서 협조를 안할때가 있다. 임원이 협조를 안해도 괜찮다. 사실상 임원과의 면담은 형식상이다. 임원 위선 세워주기 눈가림이다. 컨설턴트는 super user 로 데이터를 시스템에서 직접 수집 분석한다. 아주 짧은시간 안에 임원만큼 정확히 부서의 과거, 현재, 미래를 파학할수있다.
수집된 데이타로 data scrubbing을 해서 knowledge pool이 만들면 기술지원/투자 필요 분야가 보인다. 부서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하면 임원의 미래 성과도 예측 할수있다. 임원의 미래 성과예측은 연봉 스탁옵션 보너스 결정때 큰역활을 한다. 이런 이치를 아는 노련한 임원들은 (대부분 컨설턴트출신) 컨설턴트한테 베리베리 나이스하다. 컨설턴트는 현대판 암행어사다. 주니어 임원은 아직 마패 맛을 못본것 뿐이다.
Monday, June 12, 2017
Beers of Korea and Mexico
그때의 한국 Doosan Group / OB 맥주와 멕시코 Grupo FEMSA / Cerveceria Moctezuma 맥주 이야기이다. 비교해본다.
한국재벌 두산은 구룹이라한다. Doosan Group
멕시코 재벌들을 Grupo (구루뽀) 라한다. Grupo FEMSA
* 둘다 구룹이다
두산구룹은 Oriental Brew 맥주회사.
펨사구룹은 Cerveceria Moctezuma 맥주회사.
* 둘다 고대적인 이름이다.
두산구룹의 경쟁사 맥주는 크라운
펨사구룹의 경쟁사 맥주는 Corona
* 둘다 왕관하고 경쟁한다.
두산구룹은 코카콜라 코리아를 운영한다.
펨사구룹은 코카콜라 멕시코를 운영한다.
* 둘다 물장사 유통장사에 킹이다.
두산구룹은 컨설팅 받는것을 좋아한다.
펨사구룹은 컨설팅 받는것을 좋아한다.
* 컨설팅회사는 엄청난 액수를 매년 청구한다.
두산구룹의 임원들은 컨설팅회사에서 스카웃 돼온다.
펨사구룹의 임원들은 컨설팅회사에서 스카웃 돼온다.
* 좋아서 스탁옵션 주고 나중에 둘다 후회한다.
두산구룹은 중앙대학을 운영한다.
펨사구룹은 ITESM대학을 운영한다.
* 둘다 직원확보가 포인트다.
두산구룹은 수많은 계열사를 4개수준으로 줄이다.
펨사구룹은 수많은 계열사를 4개수준으로 줄이다.
* 나중에 매각때 편하다.
두산구룹은 맥주회사를 유럽맥주회사에 매각한다.
펨사구룹은 맥주회사를 유럽맥주회사에 매각한다.
* 컨설팅출신 임원들은 스탁옵션 엑시트가 포인트다.

한국재벌 두산은 구룹이라한다. Doosan Group
멕시코 재벌들을 Grupo (구루뽀) 라한다. Grupo FEMSA
* 둘다 구룹이다
두산구룹은 Oriental Brew 맥주회사.
펨사구룹은 Cerveceria Moctezuma 맥주회사.
* 둘다 고대적인 이름이다.
두산구룹의 경쟁사 맥주는 크라운
펨사구룹의 경쟁사 맥주는 Corona
* 둘다 왕관하고 경쟁한다.
두산구룹은 코카콜라 코리아를 운영한다.
펨사구룹은 코카콜라 멕시코를 운영한다.
* 둘다 물장사 유통장사에 킹이다.
두산구룹은 컨설팅 받는것을 좋아한다.
펨사구룹은 컨설팅 받는것을 좋아한다.
* 컨설팅회사는 엄청난 액수를 매년 청구한다.
두산구룹의 임원들은 컨설팅회사에서 스카웃 돼온다.
펨사구룹의 임원들은 컨설팅회사에서 스카웃 돼온다.
* 좋아서 스탁옵션 주고 나중에 둘다 후회한다.
두산구룹은 중앙대학을 운영한다.
펨사구룹은 ITESM대학을 운영한다.
* 둘다 직원확보가 포인트다.
두산구룹은 수많은 계열사를 4개수준으로 줄이다.
펨사구룹은 수많은 계열사를 4개수준으로 줄이다.
* 나중에 매각때 편하다.
두산구룹은 맥주회사를 유럽맥주회사에 매각한다.
펨사구룹은 맥주회사를 유럽맥주회사에 매각한다.
* 컨설팅출신 임원들은 스탁옵션 엑시트가 포인트다.

Sunday, June 11, 2017
General Lee
이석봉 장군
이석봉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2기 동기이고 육군본부 작전참모이다. 이석봉 장군은 군인신분으로 1945년 해방, 1950년 6.25 동란,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치루셨다. 그 당시 상황을 여쭈어봐도 긴말씀이 없으신 분이시다.
4.19 혁명때 이승만대통령과 직접 하햐협상을 한 학생회장의 글에는 '계엄군 기갑부대 참모장 이석봉 장군은 군은 국민의 군대이니 국민에게 총부리를 댈 수 없다고 하며 군인들에게 실탄제거명령을 내렸다. 계엄군은 우리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석봉 장군의 계엄군은 시민에게 총을 쏜 경찰을 계엄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하햐협상을 원하는 학생단체를 보호했다. 이석봉 장군은 민주를 존중하는 장군이셨다. 민주주의 한국을 원했다.
일년후 박정희는 5.16 코리아 스타트업을 란칭할때 이석봉 장군은 참가하지 않는다. 나라를 살리자고 모인 4.19 혁명군이 5.16 독재자로 변하는것을 보고 민주주의 미국으로 이민하셨다. 순수한 군인 이석봉 장군은 사랑하는 한국이 민주주의 한국이 되는것을 못보시고 로스엔젤레스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현충원이 아닌 남가주에 있는 로즈힐 묘지공원에 안착되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포함된 육사2기 동기생들은 지금의 21세기 민주주의 코리아에서는 상상도 할수없는 무시무시한 권력으로 한국의 모든 정권을 휘둘렀다. 군기록에는 육사2기생 196명중 79명이 장군이 됐다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출세한 집단이다. 육사2기생 장군들은 군복무후 현역 생명력도 훌륭했다. 그들은 생사를 건 기획끝에 현대판 대한미국 스타트업을 1961년 5.16일 서울에서 란칭한다. 국내에서는 '새마을 운동' 해외에서는 'KOREA STANDARD' 브랜드로 마케팅 전략을 세운다. 육사2기생이 시작한 코리아 스타트업은 피빗을 몇번하지만 결국 세계적인 유니콘이 된다.
FICTIONAL KOREA STARTUP DRAFT
Release: 1961.5.16
Founders: 육사2기생들
Benchmarking: 이집트의 나세르장군 -> 혁명군 -> 정치가 -> 독재가
Strategy: 해외진출
Marketing branding: '한강의 기적 코리아'
Funding source: 중국.소련으로부터 일본의 방패역활을 해줄 한국이 필요한 일본과 미국
Strength: 애국 100%, 친민족 100%, 반공정신 100%,
Weakness: 자원 0%. 한국 친구국가 0% 세계적인 리더 0%
Opportunity: 국가지원 장학생, 재벌제도
Exit: 대한민국 만세
육사2기생 장군들 현역 리스트:
Release: 1961.5.16
Founders: 육사2기생들
Benchmarking: 이집트의 나세르장군 -> 혁명군 -> 정치가 -> 독재가
Strategy: 해외진출
Marketing branding: '한강의 기적 코리아'
Funding source: 중국.소련으로부터 일본의 방패역활을 해줄 한국이 필요한 일본과 미국
Strength: 애국 100%, 친민족 100%, 반공정신 100%,
Weakness: 자원 0%. 한국 친구국가 0% 세계적인 리더 0%
Opportunity: 국가지원 장학생, 재벌제도
Exit: 대한민국 만세
박정희 대통령
이석봉 (미국이민)
이석봉 (미국이민)
이상 이름생략
중앙정보부장
아세아 자동차 회장
한양화학사장
건설부장관
총무처장관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
체신부장관
원호처장
철도청장
국회의원
안보회의비상기획위원장
교통부장관
대우중공업전무
현대정공사장
역사장
서울커트리클럽사장
대우자동차전무
동아건설산업
관세청장
호남정유
남해화학
포항제철
평화농장대표
한일합성석유공장사장
대한건설진흥회장
대림공업전문대학장
전두환대통령의 장인
한양화학고문
주택사업협회장
덕선기업사장
국제특수금속회장
동산기업대표
삼풍상임고문
Friday, June 9, 2017
PeopleSpace International
피플스페이스 (www.peoplespace.us) 는 미국 남가주 얼바인에 있는 비영리 스타트업 이큐베이터 / 보육센타이다.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근처이고 30개의 스타트업이 활동하고있다. 이번 방학때 가천대학생들의 시야를 넓히자는 목적으로 PeopleSpace 해외인턴쉽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글의 핵심은 해외인턴쉽을 다녀와 시야가 넓혀진 노메드 학생들이 기대이상으로 계속 훌륭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Day 0: 학생메일.
"제가 충분한 성장가치가 있는 학생이고 가천대학교를 알릴수 있는 학생이라는것을 메일을 통해 교수님께 알려드리고 지원을 요청하고자 메일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20년동안 한번도 서울을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천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당한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가천대학교에 입학하게되면 타지에서 혼자 생활해야했고,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와 집세까지 전부 제가 부담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이 제가힘들것이라고 걱정하고 말려도 제한계를 넘기위해도 전하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내어 가천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입학전까지 전혀 상상할수도없었던 경험을 하고있고 가천대학교를 알리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용기내어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단지 집근처대학을 졸업해서 집근처 직장을 다니면서 ‘서울은엄청난곳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을것입니다. 저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않기위해 또다시 도전을 하고자 합니다. 가천대학교 입학은 제가 위와같은 도전을 할수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PeopleSpace 인턴쉽또한앞으로 제가 도전하게될 여러경험의 발판이 될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번도전은 단지 ‘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특히 저는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못하고 혼자서 학비, 생활비, 월세를 부담하고 있어 비용을 마련하기가 더힘듭니다. 교수님께서 저를 지원해 주실수있으시다면 제가 도전할수있도록 지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도전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더성장하여 가천대학교를 알릴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Rachel at IBK-KISA blockchain hackathon
(started a block chain startup)
Click here for more photos in Pinterest
"제가 충분한 성장가치가 있는 학생이고 가천대학교를 알릴수 있는 학생이라는것을 메일을 통해 교수님께 알려드리고 지원을 요청하고자 메일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20년동안 한번도 서울을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천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당한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가천대학교에 입학하게되면 타지에서 혼자 생활해야했고,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와 집세까지 전부 제가 부담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이 제가힘들것이라고 걱정하고 말려도 제한계를 넘기위해도 전하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내어 가천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입학전까지 전혀 상상할수도없었던 경험을 하고있고 가천대학교를 알리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용기내어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단지 집근처대학을 졸업해서 집근처 직장을 다니면서 ‘서울은엄청난곳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을것입니다. 저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않기위해 또다시 도전을 하고자 합니다. 가천대학교 입학은 제가 위와같은 도전을 할수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PeopleSpace 인턴쉽또한앞으로 제가 도전하게될 여러경험의 발판이 될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번도전은 단지 ‘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특히 저는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못하고 혼자서 학비, 생활비, 월세를 부담하고 있어 비용을 마련하기가 더힘듭니다. 교수님께서 저를 지원해 주실수있으시다면 제가 도전할수있도록 지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도전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더성장하여 가천대학교를 알릴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Day 1
Our interns go on to do great things... such as
Chris: StartupWeekend Best UX/UI award
Sun, Amber, Ana: Ericsson-LG Girls in ICT Best award
Amber, Ana: Ericsson-LG Girls in ICT Best award

Rachel at IBK-KISA blockchain hackathon
(started a block chain startup)
Click here for more photos in Pinterest
Thursday, June 8, 2017
Nomad
일제시대때 태어나셔서 해방전에 교육을 받으신 우리 아버지는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셨다. 독일과 무역을 하신 3째 이모부는 사업에 유리한 독일어를 하셨다. 외교관이신 꽃이모부는 그당시의 국제외교 공식언어 불란서어를 유창히 하셨다. 나는 신문을 읽으며 한문을 배웠고 학교에서는 '디스 이스 아 도그, 데트 이스 아 케트'를 배웠다. 한국은 상당히 국제적이다. 작은 섬나라* 한국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우고 해외진출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낀다.
나는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어깨너머 배운 다양한 외국어로 어느나라를 가도 간단한 소통을 할줄 안다. 나는 장거리 강행군이 가능하고 비행기를 타면 즉시 잠을 잘수있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100% 충전되어서 생생하다.
여기서 여행과 관광을 구분할필요가 있다. 여행은 travel 엑티브하게 몸으로 격는것이고 관광은 tour 페시브하게 즐기는것이다. 동영상이나 VR 관광은 가능해도 여행은 불가능하다.
나는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어깨너머 배운 다양한 외국어로 어느나라를 가도 간단한 소통을 할줄 안다. 나는 장거리 강행군이 가능하고 비행기를 타면 즉시 잠을 잘수있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100% 충전되어서 생생하다.
여기서 여행과 관광을 구분할필요가 있다. 여행은 travel 엑티브하게 몸으로 격는것이고 관광은 tour 페시브하게 즐기는것이다. 동영상이나 VR 관광은 가능해도 여행은 불가능하다.
옛날부터 여행은 최고의 교육이었다. 부자나 영도자의 자녀들만이 누릴수있는 특권이었다. 여행만큼 시야를 넓히는 것도 없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노메드란 힘든 여행을 즐거운 관광이상으로 즐길수있는 특수 체질이다. 여행을 꺼리거나 여행을 좋아해도 체력이 못 받쳐주면 실력 노력 라인 다 소용없다. 거대한 스타트업 대륙을 용감히 전력질주할수 있는 노메드가 진정한 승자이다.
노메드란 힘든 여행을 즐거운 관광이상으로 즐길수있는 특수 체질이다. 여행을 꺼리거나 여행을 좋아해도 체력이 못 받쳐주면 실력 노력 라인 다 소용없다. 거대한 스타트업 대륙을 용감히 전력질주할수 있는 노메드가 진정한 승자이다.
Wednesday, June 7, 2017
Judo startup

나는 청소년을 정서적으로 살찌우는 예능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다. 나의 예능교육은 무술이였다. 무술은 말수가 적고 성격이 내성적인 나에게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내가 빗나가지 않은 이유는 유도라고 생각한다. 꼬마때 사촌형들이 유도한다고해서 덩달아 시작했다. 사촌형들은 싸움을 잘해서 운동을 그만두었다. 나는 몸이 약해서 계속했다. 유도만큼 힘든것은 없는것 같다. 유도를 해본 사람한테는 다른 모든것들이 쉽게 느껴진다. 그덕분에 나중에 사회생활을 '쉽게' 할수 있었다.
나는 매우 평범한 제자였지만 사범님은 국보급이다. 태권도 사범님은 태권도 오도관의 설립자 남태희 관장님 이시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위엄스런분 이지만 나한테는 인자하셨다. 관장님은 부사범님께 내가 1,500원 월회비를 못내면 도장청소 하는것으로 눈 감아주라고 하셨다. 나의 유도사범님은 대명체육관 박재호 사범님이시다. 사범님은 대명학원 (지금의 용인대학) 1회 졸업생이시다. 전세계 퍼져있는 대명라인은 홀륭한 유도제자들을 키워냈다. 그런 국보급 사범님께 배웠어도 나는 사욕심이 많아 회사에 다니며 돈버는것을 원했다. 사범님들은 평생 연구하신 자신의 전문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셨는데 나는 어디가서 내가 무술인이요 하기가 창피하다.
얼바인유도체육관장
미주유도재단협회이사
미주유도국제코치
미주유도국제심판
유도세계에서는 반듯한 신분이다. 지금 나를 여러가지 호칭이 있다. 사장, 회장, 코치, 심판, 임원, 집사, 교수, 대표 등등. 하지만 내가 가장 어렵게 얻은 호칭은 사범이다. 온갖 노력 어려움끝에 얻은 귀한 것이고 그만큼한 보람도 있다. 그 귀한 호칭이기에 사람들이 나를 사범님/센세이 라고 부르면 아직도 신기하다.
Tuesday, June 6, 2017
Korean Unicorn
코리아에서는 스타트업이 '한국식'으로 성공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식 스타트업이란 파생재벌제도 derivative 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정부차원에서는 최근 몇십년동안 새로운 재벌을 못 탄생시켰다. 정부의 라인에 서있는 재벌은 대기업의 권력으로 쓸만한 인력과 자원을 싹쓸어가기 때문이다. 노바디인 김아무개가 뭐를 시작해서 대기업세상에서 노력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보겠다는 무모한짓이다.
법정에서 끝까지 싸워서 약자도 이길수있는 adversarial judicial 방식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적당히 합의를 보고 나눠서 끝내는 방식이라 자원이 많은 강자가 새로운 기술을 뻿기에 이상한 시스템이다. 한국에서는 침묵은 금이고 나온 못이 망치질당하고 ratchette effect 이 심해 '보통'위로 평가받기를 꺼린다. 기발한 전략, 글로벌 마인드, risk taking 은 대기업들만의 특권이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적인' 스타트업한다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지 마시고...미국이나 유럽서 잘 되는것을 bench marking을 잘해서 fast follow 로 한국화 해 내면 된다. 미국식 혁신도 아니고 중국식 모방도 아닌 한국형으로.
법정에서 끝까지 싸워서 약자도 이길수있는 adversarial judicial 방식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적당히 합의를 보고 나눠서 끝내는 방식이라 자원이 많은 강자가 새로운 기술을 뻿기에 이상한 시스템이다. 한국에서는 침묵은 금이고 나온 못이 망치질당하고 ratchette effect 이 심해 '보통'위로 평가받기를 꺼린다. 기발한 전략, 글로벌 마인드, risk taking 은 대기업들만의 특권이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적인' 스타트업한다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지 마시고...미국이나 유럽서 잘 되는것을 bench marking을 잘해서 fast follow 로 한국화 해 내면 된다. 미국식 혁신도 아니고 중국식 모방도 아닌 한국형으로.
How to write a blog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존경한다. 글을 잘쓴다는 뜻은 생각이 깊다는 증거고 생각이 깊은사람만 창의적인 생각을 할수있다. 창의적인 마인드가 칼같은 소통을 할줄 알면 옛날에는 영도자로 모셨고 지금은 스타트업 임원으로 뽑는다. 조선일보 기자출신, 미국 라이코스 CEO, 지금은 스타트업 얼라이언스(Startup Alliance) 센터장을 맡고있는 Jungwook Lim 임정욱씨를 볼때마다 기분이 좋은 이유의 하나다. 기자출신이시고 지금은 한의사 스타트업을 하시는 유도브라더 Russel Choi 의 글도 빠짐없이 읽는다.
창의적인 글은 한구절만 읽어봐도 명작이고 깨닯는자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있다. 페북은 일회용글 disposable writing 프랫폼이다. 대부분 감정적이나 퍼온글에 언듯 생각나는것을 더한 글들이다. 재미있게 읽으면된다. 사실 바쁘게 사는 우리는 여유가 없고 깊게생각할 시간이 없어 창의적인글이 나올수없다.
그러나 페북을 일회용으로만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 가능성이 너무 많다. 벌써 소중한 친지와 가족사진이나 고급정보가 영구적용으로 올라와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페북을 사용해 오리지날 경험담 블로그를 쓰고 있다. 블로그는 글쓰기의 한 종류이다. 동영상이나 VR 을 통해 기록을 남기면 보기에는 쉽지만 글쓰기는 계속 최고의 지식전달도구로 남을것이다.
블로그를 쉽게 쓰는 방법.
창의적인 글은 한구절만 읽어봐도 명작이고 깨닯는자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있다. 페북은 일회용글 disposable writing 프랫폼이다. 대부분 감정적이나 퍼온글에 언듯 생각나는것을 더한 글들이다. 재미있게 읽으면된다. 사실 바쁘게 사는 우리는 여유가 없고 깊게생각할 시간이 없어 창의적인글이 나올수없다.
그러나 페북을 일회용으로만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 가능성이 너무 많다. 벌써 소중한 친지와 가족사진이나 고급정보가 영구적용으로 올라와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페북을 사용해 오리지날 경험담 블로그를 쓰고 있다. 블로그는 글쓰기의 한 종류이다. 동영상이나 VR 을 통해 기록을 남기면 보기에는 쉽지만 글쓰기는 계속 최고의 지식전달도구로 남을것이다.
블로그를 쉽게 쓰는 방법.
- 아는것을 아는만큼 쓰면된다.
- 논문이 아니다. 데이타 수집 정리 분석 필요없다.
- 장편소설이 아니다.
- 내 개인적 경험담이기 때문에 아무도 태끌할게 없다.
- 신문기사가 아니다.
- 내가 편집자고 발행자다.
- 마감도 내마음대로.
- 타겟관중이 없다. 내가 유일한 구독자란 기분으로.
- 느낌이 오는대로 생각이 나는대로 쓴다.
- 즉 마음내키는대로 쓰면된다.
Sunday, June 4, 2017
Ethiopia
나는 대학교에서 venture finance 를 가르쳤다. Venture finance 는 엄격히 말해 'how to raise the money you don't deserve' 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증안된 아이디어를 잘 포장해 Primary Investor 프라이머리 투자가의 인맥과 영향력을 통해 그다음 투자가들한테 줄줄히 투자받는방식이다. 프라이머리가 잘할수록 디일규모와 질이 변하기때문에 프라이머는 스타트업의 생명의 은인이 될수있다. 이글은 한국이란 스타트업에 투자한 아프리카 프라이머리 투자국 에티오피아에 대한 이야기다.
Venture finance 대학원반에는 아프리카에서온 장학생들이 많았다. 우간다, 켄야, 짐바브웨, 가나... 먼나라 한국까지와서 한국식 인프라와 기술을 배워가고 싶은 열정은 대단하다. 졸업후 돌아가면 각나라에서 교수 장관 사업가등등 한가락식할 쿨한친구들이다. 학생질문왈. 한국은 많은 아프리카나라중 왜 에티오피아에 계속 원조를 합니까? KOICA 기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한국원조지원대상국 톱3이다.
그이유는 거의 70년전 에티오피아의 Haile Selassie 황제가 한국에 투자했기때문이다. 재무투자만 투자가 아니다. 황제는 한국미래의 프라이머리투자가로서 다른나라에게 한국전에 참가하게 설득했다. 세계2차대전후 UN 설립당시에 아프리카의 최대 강대국 에티오피아의 셀라시 황제는 UN 미션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보호하는것으로 정하자고 주장한다. 그의 설득때문에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통21개국이 한국전에 참가한다. 에티오피아가 프라이머리 투자가의 역활을 제대로 한것이다. 그당시 상황을 보면 한국은 도와줘도 돌아올것이 없는 절대로 투자하면 안되는 나라였다. 그런 한국을 위해 황제는 왕실근위대원들로 만들어진 Kagnew Batallion 을 한국으로 파견한다. 죽음을 각오하고온 Kagnew 부대의 한국전 용맹은 전설적이다. 6,037명이 참전해서 238번 싸워 238번 이긴다. 그러나 그보다 더중요한 숫자는 121. 즉 121명의 전사자들이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한강의 기적 코리아'를 누리고 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가 불행하게도 가난한 나라로 고생하고있다. 70년전 투자받을 형편이 안될때 투자받은 한국은 원조와 한국전 참가군인연금 형태로 에티오피아에 땡큐배당을 하고 있다. 지금한국에서는 아프리칸 소셜테이블행사등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다. 좋은일이다. #진격의스타트업
Venture finance 대학원반에는 아프리카에서온 장학생들이 많았다. 우간다, 켄야, 짐바브웨, 가나... 먼나라 한국까지와서 한국식 인프라와 기술을 배워가고 싶은 열정은 대단하다. 졸업후 돌아가면 각나라에서 교수 장관 사업가등등 한가락식할 쿨한친구들이다. 학생질문왈. 한국은 많은 아프리카나라중 왜 에티오피아에 계속 원조를 합니까? KOICA 기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한국원조지원대상국 톱3이다.
그이유는 거의 70년전 에티오피아의 Haile Selassie 황제가 한국에 투자했기때문이다. 재무투자만 투자가 아니다. 황제는 한국미래의 프라이머리투자가로서 다른나라에게 한국전에 참가하게 설득했다. 세계2차대전후 UN 설립당시에 아프리카의 최대 강대국 에티오피아의 셀라시 황제는 UN 미션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보호하는것으로 정하자고 주장한다. 그의 설득때문에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통21개국이 한국전에 참가한다. 에티오피아가 프라이머리 투자가의 역활을 제대로 한것이다. 그당시 상황을 보면 한국은 도와줘도 돌아올것이 없는 절대로 투자하면 안되는 나라였다. 그런 한국을 위해 황제는 왕실근위대원들로 만들어진 Kagnew Batallion 을 한국으로 파견한다. 죽음을 각오하고온 Kagnew 부대의 한국전 용맹은 전설적이다. 6,037명이 참전해서 238번 싸워 238번 이긴다. 그러나 그보다 더중요한 숫자는 121. 즉 121명의 전사자들이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한강의 기적 코리아'를 누리고 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가 불행하게도 가난한 나라로 고생하고있다. 70년전 투자받을 형편이 안될때 투자받은 한국은 원조와 한국전 참가군인연금 형태로 에티오피아에 땡큐배당을 하고 있다. 지금한국에서는 아프리칸 소셜테이블행사등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다. 좋은일이다. #진격의스타트업

Saturday, June 3, 2017
의정부 삼호원
김덕보 외할아버지의 업적은 의정부에 있었던 삼호원 야영원이다. 지금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법인 '한마음청소년수련장'이 그때의 삼호원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원래 많은 스타트업을 시도하셨다. 토끼농장, 양돈장, 양계장, 삼재배, 딸기농사등등 안해본것들이 없으시다. 그중 성공한게 삼호원이다. 아무도 원치않던 벌거숭이산에 잦나무, 밤나무를 한구루씩 꾸준히 심은신게 푸르게 커서 자연야영장이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삼호원을 운영하시면서 많은 동네사람들을 고용해서 지역취업문제를 해결했고 고속버스회사하고 계약을 맺어 서울사람들을 의정부로 피서오게해서 지역관광산업붐을 일으켰다. 지역주민들의 생태계에 직접도움을 주었기에 경기도지사 우수공로상도 받으셨다. 천주교 신도이신 외할아버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연결돼 삼호원 founder로써 쿨하게 그때돈 40억원에 엑시트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당당한 승자로서 고향인 천국으로 가셨다.
1974년 중앙일보의 기사에 삼호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의정부에서 서울 쪽으로 5㎞떨어진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호명산 기슭 울창한 숲 속에 삼호원 휴가촌이 마련되어 6월 29일 문을 열었다. 아직은 시설물을 설치하는 중이어서 간이숙박시설 14개와 방갈로 5개소, 야영방갈로 30동 등 숙박시설은 빈약한 편이고 다만 계곡의 자연수를 막아 만든 수영장이 상당한 인기를 끌 듯.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방학중의 자녀들을 서울시내의 복잡한 풀장에 보내는 대신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계곡에는 가벼운 등산코스가 나있어 봄에는 등산·꽃놀이를, 여름에는 수영과 캠프등 피서, 가을에는 단풍놀이·밤 줍기·등산을, 겨울에는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다. 서울에서는 동양고속이 매주 일요일 9시30분에 출발한다. 회비는 풀장 입장료를 포함해서 1천2백원, 개별적으로 갔을 때 풀장 입장료는 어른 4백원 어린이 3백원. 한편 의정부시내에서 오는 11일부터 시외버스가 30분마다 정기운행될 예정. 의정부에서의 요금은 30원.'
1974년 중앙일보의 기사에 삼호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의정부에서 서울 쪽으로 5㎞떨어진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호명산 기슭 울창한 숲 속에 삼호원 휴가촌이 마련되어 6월 29일 문을 열었다. 아직은 시설물을 설치하는 중이어서 간이숙박시설 14개와 방갈로 5개소, 야영방갈로 30동 등 숙박시설은 빈약한 편이고 다만 계곡의 자연수를 막아 만든 수영장이 상당한 인기를 끌 듯.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방학중의 자녀들을 서울시내의 복잡한 풀장에 보내는 대신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계곡에는 가벼운 등산코스가 나있어 봄에는 등산·꽃놀이를, 여름에는 수영과 캠프등 피서, 가을에는 단풍놀이·밤 줍기·등산을, 겨울에는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다. 서울에서는 동양고속이 매주 일요일 9시30분에 출발한다. 회비는 풀장 입장료를 포함해서 1천2백원, 개별적으로 갔을 때 풀장 입장료는 어른 4백원 어린이 3백원. 한편 의정부시내에서 오는 11일부터 시외버스가 30분마다 정기운행될 예정. 의정부에서의 요금은 30원.'
Tuesday, May 23, 2017
World's Most Innovative Country Index
Bloomberg 에서 이런 기분좋은 조사를 발표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most innovative country 라고. 2015년 , 2016년, 2017년 싹쓸어 일등!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productivity 는 32등이다. 왜 1등 innovative 하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나라가 32등 비생산적으로 일할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1) The ratchet effect 때문에 슬슬 일하는것이다. 잘하면 평가기준만 오르고 그다음 평가때 손해가 크다. 군복무때 모든 평가를 '보통'으로 받으라고 배운다. 자기 주장을 잘하면 시간낭비한다고 태끌이 들어온다. 곰곰히 생각한 critical thinking 에서 오는 constructive criticism 비판은 상상도 못한다. 생각할 여유가 없어 곰곰히 생각을 못하고 선.후배가 서로 눈치보고 살아야 되니까 비판도 못한다. 성과에 대한 보상이 없고 상대평가라 조건이좋은 사람만 탑을 계속 유지한다. 승진도 성과대신 인사부 테이블에 있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가능하다. 사기가 바닥이다. 그래서 직원들은 온갓 노력을 해서 슬슬일한다. 비생산적으로 보일수밖에 없다. 어쩌면 32등도 후한평가이다.
2) 미국은 outsourcing 을 오래해 생산성이높은 산업만 남아있다. 소프트웨어, 디자인, 브랜드, 부품 R&D, 서비스업종은 노동이 대부분 가치가 높은 개발로 쓰인다. 당연히 생산성이 노동시간에 비해 높다. 한국은 야근을 포함해서 많은 노동시간을 투입한다. 즉 생산성계산에 불리한 비효율적으로 부지런히 일한다.
3) 제왕병 걸린 리더가 자기의 권위와 상직이 중요시하면 직원들을 모욕한다. 사기가 다운되고 생산성도 다운된다. 잘하는 기업은 한국적정의 문화, 서구시 스템적 창의성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된다.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7-01-17/sweden-gains-south-korea-reigns-as-world-s-most-innovative-economies
1) The ratchet effect 때문에 슬슬 일하는것이다. 잘하면 평가기준만 오르고 그다음 평가때 손해가 크다. 군복무때 모든 평가를 '보통'으로 받으라고 배운다. 자기 주장을 잘하면 시간낭비한다고 태끌이 들어온다. 곰곰히 생각한 critical thinking 에서 오는 constructive criticism 비판은 상상도 못한다. 생각할 여유가 없어 곰곰히 생각을 못하고 선.후배가 서로 눈치보고 살아야 되니까 비판도 못한다. 성과에 대한 보상이 없고 상대평가라 조건이좋은 사람만 탑을 계속 유지한다. 승진도 성과대신 인사부 테이블에 있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가능하다. 사기가 바닥이다. 그래서 직원들은 온갓 노력을 해서 슬슬일한다. 비생산적으로 보일수밖에 없다. 어쩌면 32등도 후한평가이다.
2) 미국은 outsourcing 을 오래해 생산성이높은 산업만 남아있다. 소프트웨어, 디자인, 브랜드, 부품 R&D, 서비스업종은 노동이 대부분 가치가 높은 개발로 쓰인다. 당연히 생산성이 노동시간에 비해 높다. 한국은 야근을 포함해서 많은 노동시간을 투입한다. 즉 생산성계산에 불리한 비효율적으로 부지런히 일한다.
3) 제왕병 걸린 리더가 자기의 권위와 상직이 중요시하면 직원들을 모욕한다. 사기가 다운되고 생산성도 다운된다. 잘하는 기업은 한국적정의 문화, 서구시 스템적 창의성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된다.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7-01-17/sweden-gains-south-korea-reigns-as-world-s-most-innovative-economies
Sunday, May 21, 2017
Customer Focused
프로고객마인드로 엄청돈을 번 존디주리어스가 환불에 대해서 말해준 꿀팁이다. 존의 스타트업 미용실에서 고객의 비싼옷에 염색약이 묻는 사고가 있었다. 고객의 요구는 환불+세탁비 $150. 고객기록을 보니 거래금액도 적고 거래 빈도도 적은 고객이다. 고객유지안해도 되는 고객평생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냥 노 하고 끝낼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도 지긋하시고 교양있어 보이는 고객님이 어거지로 환불 요청한것같지는 않았다. 속은셈치고 환불과 세탁비를 드린다. 더자주 찾아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띠엄띠엄 오시다 결국 안 나타난다. 괘심하다. 그후 우연히 새 고객과 말을 나누던중 사라져버린 고객의 소개로 왔다고한다. 다른 고객들의 기록을 찾아보니 사라져버린 고객의 소개로 온사람들이 꽤있다. 대부분 거래금액도 많고 거래 빈도도 많은 고객들이다. $150 어치의 마케팅으로는 한명의 새고객을 모시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150의 환불은 몇백배의 이익으로 돌아온것이다. 그후로 존의 미용실직원들은 가끔 염색약실수한다. 존의 고객들이 평생영업원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다.
Fast-Track.Asia 의 패스트켐퍼스는 스타트업이다. 미국에서 $100 million 펀딩받은 제너럴 어셈브리가 하고있는 edutech 사업을 제대로 fast follow 하고 있다고 본다. 패스트켐퍼스사의 홈페이지에도 '커리어 성장을 위한 최고의 실무교육 아카데미'라고 소개돼있다. 상당히 정리된 고상한 전략이다. 실무교육에 신뢰가 가는 과장광고들이 큼직하고 조리있게 나와있다. 투명성있는 환불규정도 홈페이지에 나와있다. 나는 패스트켐퍼스사의 팬으로서 응원하는 기분으로 유료강의를 신청했다. 그후 여러이유로 정당한 환불요청을 했더니 대답이 시원치않다. 환불을 굉장히 아끼는 자세다. 대답이 시원치 않다라는 뜻은 자기네 주장만하고 환불규정기준을 재교육 시킨다. 한달걸리면서 환불 기다리던중에 패스트켐퍼스사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사실상 패스트켐퍼스사의 행동은 수학적인 전략이다. 나는 고객평생가치가 없는 고객이기때문이다. 그러나 경영에서는 고객평생가치 없는 고객이라고 무시하고 환불을 아끼면 안되는 법이 있다. 존의 환불고객은 평생영업원이되지만 패스트켐퍼스사의 환불고객은 불평 blog 이나 쓰고있다.
Fast-Track.Asia 의 패스트켐퍼스는 스타트업이다. 미국에서 $100 million 펀딩받은 제너럴 어셈브리가 하고있는 edutech 사업을 제대로 fast follow 하고 있다고 본다. 패스트켐퍼스사의 홈페이지에도 '커리어 성장을 위한 최고의 실무교육 아카데미'라고 소개돼있다. 상당히 정리된 고상한 전략이다. 실무교육에 신뢰가 가는 과장광고들이 큼직하고 조리있게 나와있다. 투명성있는 환불규정도 홈페이지에 나와있다. 나는 패스트켐퍼스사의 팬으로서 응원하는 기분으로 유료강의를 신청했다. 그후 여러이유로 정당한 환불요청을 했더니 대답이 시원치않다. 환불을 굉장히 아끼는 자세다. 대답이 시원치 않다라는 뜻은 자기네 주장만하고 환불규정기준을 재교육 시킨다. 한달걸리면서 환불 기다리던중에 패스트켐퍼스사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사실상 패스트켐퍼스사의 행동은 수학적인 전략이다. 나는 고객평생가치가 없는 고객이기때문이다. 그러나 경영에서는 고객평생가치 없는 고객이라고 무시하고 환불을 아끼면 안되는 법이 있다. 존의 환불고객은 평생영업원이되지만 패스트켐퍼스사의 환불고객은 불평 blog 이나 쓰고있다.
Tuesday, May 16, 2017
Sales & Marketing
"한 번 들른 사람이 ‘음식 맛있군, 가격도 착하고’라고 느껴서 ‘다음에 또 와야겠다’ 그 생각만 하게 만들면 돼요.” – 오비맥주 전 부사장 이영길
이영길 부사장은 고객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새고객을 개발하는데 드는 마케팅 비용보다 재거래 고객을 유지하는 비용이 저렴하기때문이다. 고객을 유지하면 고객이 머무는 기간 동안 창출하는 총이익이있다. 고객평생가치 ( CLV: Customer Lifetime Value)이다. 거래금액이 적더라도 오래거래할수록 거래 빈도가 높아져 고객의 가치가 오른다.
여기서 그가 살짝 지나친 부분은 "한번 들른 사람" 이다. 왜 사람은 한번 들르기로 마음을 먹을까? 과장광고에 의해서다. 원래 광고라는 것은 "lying without getting caught" 이다. 대부분 광고들이 과장광고가 아닐확률이 매우 적다. 과장광고가 무조건 나쁜건만은 아니다. 거짓광고는 사기지만 과장광고는 마케팅의 핵심본질이다. 대한항공광고를 보자. 항공여행은 사실 피곤하다. LA에서 인천까지는 장장 12시간이다. 비지네스클라스를 타도 심한 난류는 꼭 한두번느낀다. 항공산업에는 추락이라는 단어까지 있다. 그래서 Fly the Friendly Sky 라는 주장은 엄격히 따져보면 과장광고다. 스카이는 절대로 프렌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델들의 유니폼과 색상의 아룸다운 조화가 어루려서 기분이 좋은 광고다. 과장광고든 아니든 나는 기분좋은 대한항공을 계속탄다.

이영길 부사장은 고객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새고객을 개발하는데 드는 마케팅 비용보다 재거래 고객을 유지하는 비용이 저렴하기때문이다. 고객을 유지하면 고객이 머무는 기간 동안 창출하는 총이익이있다. 고객평생가치 ( CLV: Customer Lifetime Value)이다. 거래금액이 적더라도 오래거래할수록 거래 빈도가 높아져 고객의 가치가 오른다.
여기서 그가 살짝 지나친 부분은 "한번 들른 사람" 이다. 왜 사람은 한번 들르기로 마음을 먹을까? 과장광고에 의해서다. 원래 광고라는 것은 "lying without getting caught" 이다. 대부분 광고들이 과장광고가 아닐확률이 매우 적다. 과장광고가 무조건 나쁜건만은 아니다. 거짓광고는 사기지만 과장광고는 마케팅의 핵심본질이다. 대한항공광고를 보자. 항공여행은 사실 피곤하다. LA에서 인천까지는 장장 12시간이다. 비지네스클라스를 타도 심한 난류는 꼭 한두번느낀다. 항공산업에는 추락이라는 단어까지 있다. 그래서 Fly the Friendly Sky 라는 주장은 엄격히 따져보면 과장광고다. 스카이는 절대로 프렌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델들의 유니폼과 색상의 아룸다운 조화가 어루려서 기분이 좋은 광고다. 과장광고든 아니든 나는 기분좋은 대한항공을 계속탄다.

Friday, May 12, 2017
Knowledge Transfer
진격의 스타트업 #4: Knowledge Transfer
월가분석가는 본좌의 회사의 성공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후한 스탁옵션과 주식소유구조가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자신감에서 오는 직무책임감과 만족도를 높여 빠른 시장장악력에 도왔다 라고 한다. 우리회사는 대기업과 달리 학벌,학점 안따지기로 유명했다. 일을 잘하면된다. 객관적인 성과평가에 대한 보상을 준다.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라는자신감은 직원들을 착취용 인적자원 (Human Resources) 이 아닌 투자가치가 있는 인적자본 (Human Capital) 으로 보느것에서 온다. HCMS (Human Capital Management System)가 보편화된게 이때부터이다. 이런이치를 이해못해주는 엔지니어들의 이직율은 높았다. 톱크래스 경쟁사가 빼앗아가지않으면 창업한다고 나간다. 우리는 곱게 보낸다. "Good luck, keep in touch, and come back anytime"이다. 곱게 보낼수있는 이유는 엔지니어의 지식을 벌써 데이다베이스에 담아놓았다. 데이다베이스를 보면서 신입엔지니어가 on the job training 을 독학으로 제대로 할수있다. 곱게 보내면 우리 기밀이 노출될확률도 적다. 만약 이직한 엔지니어가 필요하면 우리가 다시 데려온다. 곱게 보낸만큼 곱게 다시 돌아온다. 경쟁사에가서 공짜로 고급연수하고 온다고 본다. 절대로 그쪽의 기밀을 노리는건 아니다. 물론 연봉과 스탁옵션이 쎄진다. 재무에서 뭐라고 그래도 좋은 현상이다. 쎈 연봉과 스탁옵션에 가족처럼 다시 받아준다고 직무책임감과 만족도가 높은직원은 좋은 소문을 내며 전직의 톱크래스 동료들을 데리고온다. 이것도 전쟁이다.
월가분석가는 본좌의 회사의 성공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후한 스탁옵션과 주식소유구조가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자신감에서 오는 직무책임감과 만족도를 높여 빠른 시장장악력에 도왔다 라고 한다. 우리회사는 대기업과 달리 학벌,학점 안따지기로 유명했다. 일을 잘하면된다. 객관적인 성과평가에 대한 보상을 준다.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라는자신감은 직원들을 착취용 인적자원 (Human Resources) 이 아닌 투자가치가 있는 인적자본 (Human Capital) 으로 보느것에서 온다. HCMS (Human Capital Management System)가 보편화된게 이때부터이다. 이런이치를 이해못해주는 엔지니어들의 이직율은 높았다. 톱크래스 경쟁사가 빼앗아가지않으면 창업한다고 나간다. 우리는 곱게 보낸다. "Good luck, keep in touch, and come back anytime"이다. 곱게 보낼수있는 이유는 엔지니어의 지식을 벌써 데이다베이스에 담아놓았다. 데이다베이스를 보면서 신입엔지니어가 on the job training 을 독학으로 제대로 할수있다. 곱게 보내면 우리 기밀이 노출될확률도 적다. 만약 이직한 엔지니어가 필요하면 우리가 다시 데려온다. 곱게 보낸만큼 곱게 다시 돌아온다. 경쟁사에가서 공짜로 고급연수하고 온다고 본다. 절대로 그쪽의 기밀을 노리는건 아니다. 물론 연봉과 스탁옵션이 쎄진다. 재무에서 뭐라고 그래도 좋은 현상이다. 쎈 연봉과 스탁옵션에 가족처럼 다시 받아준다고 직무책임감과 만족도가 높은직원은 좋은 소문을 내며 전직의 톱크래스 동료들을 데리고온다. 이것도 전쟁이다.
Wednesday, May 10, 2017
Startup Universities
본좌의 회사에서 유도를 통해 성공한 케이스를 소개한다. 실리콘밸리붐때는 이직률이 높았다. 기술자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온거다. 환상적인 복지조건, 성과에 대한 보상/승진, 수평조직, 사내교육, 해외유학, 스탁옵션, paid time off, bring dog to work, matrix management, empowerment, decentralization... 이때 보편화된 신인사제도들이다. 그러나 경쟁사가 벤치마킹을해 우리직원들을 빼앗아간다. 우리도 빼앗아온다. 전쟁이다. 직원이 필요해 온갖 고민을 다한다. 그때 생각한게 한국유도이다. 한국유도는 1909년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독립운동에 절대필요한 장정 100명을 육성하자라는 계기로 시작됐다. 그래서 본좌의 회사에서 같은 정책을 세운다. 10개 명문대에서 10 명씩 뽑아 IT 장정 100명을 육성하자.
동부 Ivy League 명문대를 찾아본다. Cornell, MIT, Pennsylvania 에서 1명씩 뽑았다. 더이상은 불가능했다. 사실상 명문대학생들은 대기업에 취업이 잘된다. 못 들어본 스타트업까지 올필요없다. 창업을 해도 Boston/NY지역 창업생태계환경이 너무 좋아 서부까지 안온다.
Public Ivy League 를 찾아본다. Public Ivy League는 미시간, 캘리포니아, 텍사스, 일르노이처럼 땅 덩어리가 커서 세금 수익이 좋은 주에 있어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보유하고 있는 주립대학들이다. 훌룡한 교수진이 훌룡한 연구를하며 훌룡한 제자들을 찍어낸다. 아무도 무시못할 인재공장이다. UC Berkeley, U of Michigan, U of Illinois, U of Texas 등등이다. 문제는 이들은 졸업후 취업을하든 창업을하든 학교근처에서 잘안떠난다. Risk Taking 이 적다고 보면된다.
Smaller 사립대와 state college를 찾아본다. 대박이다. Top 학생들은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다. 다만 명문대도 아니고 Public Ivy League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미디아홍보의 빛을 못보고있다 뿐이다.
나만의 대학 랭킹 리스트를 공개한다. 우리회사로 좋은인재들를 꾸준히 보내주어 회사의 발전에 중추적 역활을한 대학들이다.
1) USC
2) Santa Clara University
3) Loyola Marymount
4) CSU (chico, northridge, san jose, san diego)
5) Carnegie Mellon
6) Rutgers
7)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8) Howard University
이들은 한국으로 비교하면 가천대, 국민대, 세종대, 외국어대 등등... 지방대를 포함한 소프트웨어 중심 대학들이다. 훌룡한 리더들이 조용히 꾸준히 성실히 제자들를 가르친다. 그분들의 제자들은 현장에서 그 누구와 일대일해도 노프라브름이다. (Loyola Marymount, Santa Clara University는 교육에 헌신하는 종교적 Jesuit 스쿨이다. 다른 유명대에 합격해도 학생들이 자원해서 가는 훌룡한 대학이다. 포항의 한동대이다. 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Carnegie Mellon 은 동부명문대에서 제발 오셔서 연구해주십시요 하며 최고의 조건으로 모시고 가는 교수들을 빼앗아온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
동부 Ivy League 명문대를 찾아본다. Cornell, MIT, Pennsylvania 에서 1명씩 뽑았다. 더이상은 불가능했다. 사실상 명문대학생들은 대기업에 취업이 잘된다. 못 들어본 스타트업까지 올필요없다. 창업을 해도 Boston/NY지역 창업생태계환경이 너무 좋아 서부까지 안온다.
Public Ivy League 를 찾아본다. Public Ivy League는 미시간, 캘리포니아, 텍사스, 일르노이처럼 땅 덩어리가 커서 세금 수익이 좋은 주에 있어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보유하고 있는 주립대학들이다. 훌룡한 교수진이 훌룡한 연구를하며 훌룡한 제자들을 찍어낸다. 아무도 무시못할 인재공장이다. UC Berkeley, U of Michigan, U of Illinois, U of Texas 등등이다. 문제는 이들은 졸업후 취업을하든 창업을하든 학교근처에서 잘안떠난다. Risk Taking 이 적다고 보면된다.
Smaller 사립대와 state college를 찾아본다. 대박이다. Top 학생들은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다. 다만 명문대도 아니고 Public Ivy League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미디아홍보의 빛을 못보고있다 뿐이다.
나만의 대학 랭킹 리스트를 공개한다. 우리회사로 좋은인재들를 꾸준히 보내주어 회사의 발전에 중추적 역활을한 대학들이다.
1) USC
2) Santa Clara University
3) Loyola Marymount
4) CSU (chico, northridge, san jose, san diego)
5) Carnegie Mellon
6) Rutgers
7)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8) Howard University
이들은 한국으로 비교하면 가천대, 국민대, 세종대, 외국어대 등등... 지방대를 포함한 소프트웨어 중심 대학들이다. 훌룡한 리더들이 조용히 꾸준히 성실히 제자들를 가르친다. 그분들의 제자들은 현장에서 그 누구와 일대일해도 노프라브름이다. (Loyola Marymount, Santa Clara University는 교육에 헌신하는 종교적 Jesuit 스쿨이다. 다른 유명대에 합격해도 학생들이 자원해서 가는 훌룡한 대학이다. 포항의 한동대이다. 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Carnegie Mellon 은 동부명문대에서 제발 오셔서 연구해주십시요 하며 최고의 조건으로 모시고 가는 교수들을 빼앗아온다. 그만한 능력이 있다.
Tuesday, May 2, 2017
IBM
나는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안정적인 IBM 에서 퇴사하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세계로 들어갔다. 닷컴붐때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직원수를 10,000명 이상으로 키운다. 실리콘밸리의 좋은점은 개발자가 제대로 대우를 받는다. 다른곳에서는 개발자는 고급 노동자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신급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톡옵션이 빵 터질때가 온다. 실리콘밸리 출신들의 특권인 pay it forward 정신이 있다.
나는 지금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Calculated Risk Taking 모험감수의 정신을 전달해주고 싶다. 창업학생이 유도같은 physically tough and mentally tougher 경험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창업 희망 학생들에게 남가주 얼바인에 있는 PeopleSpace 통해서 해외 영업 진출에 필요한 국제적인 시각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줄계획이다.
나는 지금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Calculated Risk Taking 모험감수의 정신을 전달해주고 싶다. 창업학생이 유도같은 physically tough and mentally tougher 경험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창업 희망 학생들에게 남가주 얼바인에 있는 PeopleSpace 통해서 해외 영업 진출에 필요한 국제적인 시각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줄계획이다.
Monday, May 1, 2017
Silicon Valley
나는 그 유명하다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했다. 그것도 절호의 기회 닷컴 붐때다. 타이밍하나는 A+ 학점이다. 그와중 마이클양이 mysimon.com을 $700Million에 파는것을 본다. 기분이 되게 좋겠지? 상상해본다. mysimon.com이 팔린 바로 다음날 우연히 마이클 양을 만나 물어봤다. 기분이 째지게 조타더라. 마이클양은 교포로서 닷컴 붐때 실리콘밸리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물론 렌전데리 텔레비디오 황규빈 회장님도 계시지만 마이클양은 나랑 비슷한 처지라 쉽게 정이 갔다. 나이도 비슷하고 부모님들도 같은 교회다니시고 비슷한 환경에서 미국에서 자랐다. 지금은 남가주에서 행복하게 조용히 사는 마이클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아쉽다. 성공한 마이클양한테 배워야한다.
마이클양같이 성공한 사람은 숨겨져있고 실패한 사람들은 찾기가 쉽다는 점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대도록이면 실패보다 성공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성공 비결을 배우고 싶다는 수준 높은 분도들도 미팅을 드리면 빅픽처 고민, 꼼꼼한 따짐, 핵심적인 질문없이 일방적인 강의만 듣다간다. 혁신적으로 바뀌는 스타트업세계에서는 청각합습강의는 영양가가 없다. 나는 성공경험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의 사실은 서울에서의 사실이 아닐수도 있고 한시절의 사실도 유행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것들이 바뀌어도 안 변하는것은 돈과 사람문제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차라리 쉬운부분은 기술과 전략이다. 힘들었던것들은 돈과 인사문제였다. 끈임없는 연구를 해서 돈과 인사문제는 이해가 간다. 그래서 가천대에서 실리콘밸리서 필요로 했던 venture finance 와 strategic human resource management 을 가르친다.
강의 TOPICS
채융기준의 설정
채용
숙련투자
이직관리
의사 결정
조직 구조
직무 설계
발전된 직무설계
성과평과
성과에 대한 보상
경력 기반 상여급
옵션과 경영진에 대한 보수
복지
창업가 정신과 사내기업가 정신
고용관계
마이클양같이 성공한 사람은 숨겨져있고 실패한 사람들은 찾기가 쉽다는 점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대도록이면 실패보다 성공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성공 비결을 배우고 싶다는 수준 높은 분도들도 미팅을 드리면 빅픽처 고민, 꼼꼼한 따짐, 핵심적인 질문없이 일방적인 강의만 듣다간다. 혁신적으로 바뀌는 스타트업세계에서는 청각합습강의는 영양가가 없다. 나는 성공경험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의 사실은 서울에서의 사실이 아닐수도 있고 한시절의 사실도 유행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것들이 바뀌어도 안 변하는것은 돈과 사람문제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차라리 쉬운부분은 기술과 전략이다. 힘들었던것들은 돈과 인사문제였다. 끈임없는 연구를 해서 돈과 인사문제는 이해가 간다. 그래서 가천대에서 실리콘밸리서 필요로 했던 venture finance 와 strategic human resource management 을 가르친다.
강의 TOPICS
채융기준의 설정
채용
숙련투자
이직관리
의사 결정
조직 구조
직무 설계
발전된 직무설계
성과평과
성과에 대한 보상
경력 기반 상여급
옵션과 경영진에 대한 보수
복지
창업가 정신과 사내기업가 정신
고용관계
Tuesday, March 7, 2017
Visiting Professor
안녕하세요, 저는 G대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읍니다. 한국서 교수로 관심있으신 분들을 위하여 공유합니다.
대기업
G대학은 재벌 대기업과 교류없음. 교내에 재벌 스폰연구실없음. 총장님이 셀프재벌 오너. 다른 재벌돈 필요없음. 학교전체가 오너기업임. 훌룡함.
사무실
첫출근해서 사무실열쇠를 받았서 들어갔는데 심한 담배냄새. 사용불가능.
ActiveX
이메일, 학과 관리, 메신저 등 업무에 필요한 싸이트를 들어가니 ActiveX 가 태끌을 함. 하루종일 ActiveX와 싸우다 결국 항복. 조교한테 콤퓨터를 필요할때마다 빌려쓰겠다고함. 조교는 순진해서 웃음.
교내교수식당:
교내교수식당에서 화요일 6시후에는 저녁이 공짜. 그러나 다른날들은 유료. 화요일에만 저녁드시러 오시는 교수님들이 꽤많음. 신기한 절반 인센티브.
학생평가
첫 업무로 프로그래밍 지식이 많은 인사자원관리 강의를 함. 상대적평가의 모순과 절대적평가의 필요성을 강추. 조교왈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하셔야되요. 교수의 전문성 무효.
부총장님
동정심이 많으신 부총장님이 일주일에 한번씩 개인적으로 런치미팅을 주심. 대박. 기대이상의 인센티브.
학생들
학생출석부사진과 실물다름. 사진은 고졸때의 어린얼굴. 지금 여학생들은 화장을 하고 정숙한 숙녀들. 남학생들은 군대갔다온 사나이들.
외국유학생들
교내 식당에서 영어로 수다떨며 런치 먹고있음. 브라질, 베트남, 미안말, 켄야, 미국, 우간다, 카작스탄국적들이 성남에서. 런던이나 뉴욕에서나 있을수있는 장면.

대기업
G대학은 재벌 대기업과 교류없음. 교내에 재벌 스폰연구실없음. 총장님이 셀프재벌 오너. 다른 재벌돈 필요없음. 학교전체가 오너기업임. 훌룡함.
사무실
첫출근해서 사무실열쇠를 받았서 들어갔는데 심한 담배냄새. 사용불가능.
ActiveX
이메일, 학과 관리, 메신저 등 업무에 필요한 싸이트를 들어가니 ActiveX 가 태끌을 함. 하루종일 ActiveX와 싸우다 결국 항복. 조교한테 콤퓨터를 필요할때마다 빌려쓰겠다고함. 조교는 순진해서 웃음.
교내교수식당:
교내교수식당에서 화요일 6시후에는 저녁이 공짜. 그러나 다른날들은 유료. 화요일에만 저녁드시러 오시는 교수님들이 꽤많음. 신기한 절반 인센티브.
학생평가
첫 업무로 프로그래밍 지식이 많은 인사자원관리 강의를 함. 상대적평가의 모순과 절대적평가의 필요성을 강추. 조교왈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하셔야되요. 교수의 전문성 무효.
부총장님
동정심이 많으신 부총장님이 일주일에 한번씩 개인적으로 런치미팅을 주심. 대박. 기대이상의 인센티브.
학생출석부사진과 실물다름. 사진은 고졸때의 어린얼굴. 지금 여학생들은 화장을 하고 정숙한 숙녀들. 남학생들은 군대갔다온 사나이들.
외국유학생들
교내 식당에서 영어로 수다떨며 런치 먹고있음. 브라질, 베트남, 미안말, 켄야, 미국, 우간다, 카작스탄국적들이 성남에서. 런던이나 뉴욕에서나 있을수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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